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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세상읽기] 남 탓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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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탓이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는 태도를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귀인(歸因)이라 한다. 사건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그다음에 이어질 행동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귀인은 심리학의 중요한 주제로 연구돼 왔다.

경향신문

한민 문화심리학자


예를 들면, 시험을 잘 못 본 학생이 그 이유를 자신의 노력 부족에서 찾았다면 학생은 다음에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이다. 시험을 잘 못 본 다른 학생이 만약 자신이 시험을 못 본 이유를 문제를 이상하게 낸 선생님 탓으로 돌렸다면 이 학생이 다음에 시험을 잘 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선생님이 문제를 ‘제대로(?)’ 내시기를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이러한 귀인 과정은 귀인 차원에 따라 달라진다. 연구자들은 우선 통제의 소재를 들고 있다. 사건의 원인이 행위자 자신에게 있으면 내부 귀인, 상황이나 조건처럼 행위자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있으면 외부 귀인이 그것이다.

앞의 예에서 시험 못 본 것을 자신의 노력에 귀인한 학생은 내부 귀인을, 문제를 이상하게 낸 선생님에게 돌린 학생은 외부 귀인을 한 셈이다. 그러면, 이런 귀인의 방향은 어떻게 결정될까. 우선 동기와 관련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성취동기가 있는 이들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단점을 보완하고 역량을 발전시켜 다음에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더 좋은 결과를 낳을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반면, 일단 눈앞의 부정적 결과를 회피하고자 하는 이들은 외부 귀인을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내부 귀인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지진이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나 다른 나라의 전쟁, 세계 경기의 흐름 등으로 인한 불행한 일들은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런 경우에까지 내부 귀인을 하는 습관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까지 자기 탓을 하면 쉽게 우울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고양적 귀인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취는 운이 좋아서, 나의 성취는 능력이나 노력의 결과라 믿는다. 실패에서는 반대의 패턴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실패는 능력 부족, 내 실패는 상황과 조건 등의 탓을 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 딱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자기고양적 귀인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자존감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나 늘, 한결같이 자기고양적 귀인을 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심리적 결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잘한 것은 다 제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 안 된 것은 다 남이 잘못한 거라는 태도 말이다.

매사에 이런 경향을 보이는 사람은 일단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의심해볼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실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는 자기애성 성격은 그토록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신이 잘못이나 실수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남 탓을 한다. 자기애성 성격보다 더 심각한 케이스는 남 탓이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경우다.

정신역동 이론에 ‘투사’라는 방어기제가 있다.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거나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엄습할 때, 인간의 정신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주위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일들이 자신의 실수나 능력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자 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투사, 바로 남 탓이다. 이 방어기제는 성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성인의 행위양식일 리가 없다.

더구나 좋은 것만 차지하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는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책임 있는 사람의 남 탓은 결국 자신은 이 결과에 책임이 없으며 앞으로도 남에게 책임을 묻는 일 외에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는 개인의 성숙도와는 별개로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가 있다.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그 자리를 맡는 편이 좋겠으나 만약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남 탓만 하고 있는 상황은 사회의 불행이다. 매사를 남 탓으로 일관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 피로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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