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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드라마 <나쁜엄마>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이진송의 아니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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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과거를 벗어나 후회를 지울 수 있을까

경향신문

사회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35세 아들 강호(이도현 분)는 사고로 인해 겨우 목숨을 건지고 7세의 지능을 갖게 된다. 엄마인 영순(라미란 분)은 아들과 함께 과거를 지우고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 동행한다. JT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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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나쁜 엄마>(JTBC)에서 영순(라미란 분)은 사고로 지능이 7세 때로 돌아간 아들 강호(이도현 분)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과거를 돌이키고 싶어 하는데, 그동안의 기억을 모두 잊고 ‘일곱 살부터’ 시작해야 하는 강호는 그런 기회를 잡았다는 의미이다. 35세의 남성이 하루아침에 7세의 지능을 가지게 되자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데, 아들이 상처받을까봐 영순이 내뱉은 임기응변이다. 이 말은 그러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영순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갇혀 산다. 몇 번이고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복기하고, 그 시절이 남긴 상처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회한을 삼킨다. <나쁜 엄마>는 그중에서도 유년 시절과 부모(양육자)와 자식(피양육자) 사이의 관계를 선택함으로써 시청자를 적극적으로 드라마 안으로 초대한다.

<나쁜 엄마>의 공식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자식을 위해 악착같이 나쁜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영순’과 아이가 되어버린 아들 ‘강호’가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가는 감동의 힐링 코미디.” 1987년, 가족을 잃고 외롭게 살아가던 영순은 최해식(조진웅 분)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그런데 88 올림픽 마라톤 코스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영순과 해식의 돼지농장을 철거하겠다는 통보를 받는다. 최해식은 부당한 집행에 항거하지만, 용역 깡패 송우벽(최무성 분)은 농장에 불을 지르고 최해식을 살해한다. 송우벽과 결탁한 비리 검사 오태수(정웅인 분)는 최해식의 신뢰를 이용하고, 자살로 위장된 살인 사건을 은폐한다. 모든 것을 잃은 영순은 힘이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최해식의 죽음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강호를 판검사로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영순이 혹독하게 몰아붙인 결과, 강호는 마침내 검사가 된다. 그런데 강호는 번듯한 재벌로 신분을 세탁한 송우벽의 양아들로 들어가겠다며 절연을 선언한다. 오태수의 사위가 되려던 강호는 오태수의 딸 오하영(송비라 분)이 몰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다. 전신마비와 기억 퇴행으로 7세 수준에 머물게 된 강호는 영순과 함께 고향 조우리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커다란 줄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복수극이다. 그래서 강호가 당한 사고가 오태수의 공작이라거나, 강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우벽그룹과 오하영에게 접근했다는 점, 초반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비리 검사로 그려졌던 강호가 사실은 그렇게까지 악하지 않다는 점 등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14부작의 대부분인 10화에 이르기까지, <나쁜 엄마>의 초점은 복수보다는 강호와 영순의 일상에 맞춰져 있다. 공식 소개가 이 드라마의 장르를 ‘복수극’이 아니라 ‘힐링 코미디’라고 표기한 까닭이다.

자식을 위해서 악착 같았던 엄마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엄마’에 대한 선·악의 경계는 모호

회한 속 다시 아이로 돌아온 아들
초기화 된 모자, 서로를 드러내고
과거 재현하며 치유를 시도한다

‘나쁜 엄마’도 ‘좋은 엄마’도 없다
단지 상황이 나쁘거나 좋을 뿐

극의 초반, 영순과 강호의 관계는 살벌하다. 공부에 집착한 영순은 배부르면 졸린다는 이유로 성장기의 강호에게 밥 한 번 마음 편히 먹지 못하게 감시하고, 검사가 된 강호는 집 앞에 찾아온 어머니를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후 7세의 지능으로 돌아간 강호는 식사를 거부하며 영순의 애를 바짝 태운다. 그러다 강호가 “배부르면 졸리고, 졸리면 공부를 못한다”는 말을 쏟아낸다. 영순이 강호에게 늘 했던 말이다. 아이로 돌아간 강호의 입에서 고스란히 복원되는 ‘그 시절’은 시간의 경과와 거리 두기를 통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양육이 자행하는 어떤 폭력을 적시한다. 영순은 자책하며 무너진다.

이 지점에서 시청자의 상황에 따라 누구에게 이입하느냐가 갈릴 것이다. 아동의 권리나 감정 등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을 거치며 아직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가 울고 있는 사람과, 그 시절을 양육자로 살면서 ‘자식을 위해서’ 했다고 믿은 선택이 뒤늦게 업데이트되는 양육 정보와 시간의 축적으로 사무치는 후회로 밀려오는 사람. 영순과 강호의 마음을 다 알겠다며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다.

‘아동’은 동서양을 통틀어 근대에 이르러 발명된 개념이며,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바람직한 양육의 기술과 가정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나 부모와의 애착이 개인에게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00년 정도 전이며, 부모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가족계획 사업부터이다. 아동의 감정을 존중하고, 체벌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인 2000년대 이후다. 1990년대까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동·청소년은 온갖 도구로 두들겨 맞았다.

최근 <금쪽같은 내 새끼>나 <금쪽 상담소>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배경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직면하고 치유하고 싶은 시청자들의 욕망이 존재한다. <나쁜 엄마>에서 강호의 정신 연령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설정은 이러한 시대적 욕구를 건드린다.

‘내재 과거아’란 어른이 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 그대로 남아 영향을 끼치는, 과거에 거쳐온 어린이의 모습을 일컫는 개념이다. 7세의 강호는 내재 과거아의 상징적인 현현이다. 강호는 아이로 돌아가고서야, 성과를 요구하는 엄마 앞에서 감춰야 했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낸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엄마가 제일 좋고, 엄마가 제일 예쁘다는 강호 앞에서 영순 역시 강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들었던 회초리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강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노력한다.

강호를 잃을 뻔했던 영순은 이제 존재만으로도 감사하고 기쁘다는 것의 의미를 안다. 사지마비를 겪은 강호의 재활 과정은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과 같다. 강호가 서툴게 수저를 쓰기 시작하면, 국과 밥을 다 흘려도 영순은 기뻐한다. 휠체어에 태워 다녀야 했던 강호가 처음 걷는 순간과, 아기 강호가 첫걸음마를 떼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는 영순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그래서 뭉클하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특정 행위의 실천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연극 치료로 보일 정도다.

영순은 주인공이고, 누구보다 헌신적이기에 ‘나쁜 엄마’는 사실 반어법이다. 그래서 강호는 사고로 기억을 잃기 전부터 영순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고 그 혹독한 훈육마저 사랑이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양육에 내포된 폭력이라는 게 참 어렵다. 일단 폭력이라고 명명하기 어렵고, 사랑은 가해자의 변명으로 자주 호출된다. 상처받은 피양육자가 양육자의 사정까지 이해해줘야 하나? 이렇게 울컥할 수도 있다.

한편 사랑해서, 너를 위해서 그랬다는 말은 단순히 가해자의 변명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층위에 존재한다. 그것은 일정 부분 진실일 때도 있고, 아동에 대한 인식이 훨씬 더 험했던 시절에 성장한 양육자에게 연민이 샘솟기도 한다. 양육자의 처지에서도, 후회와 억울함이 공존할 수 있다. 이렇듯 자신이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 양육자와의 관계가 어땠는지, 그것을 지금 어떻게 회상하는지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 난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유롭게 자신의 언어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한 시절에 대해 명명하고 정돈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세상에 나쁜 부모(양육자)는 있고, 완벽한 부모(양육자) 역시 없다는 명제가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사회, 어떤 폭력은 정확하게 구별될 필요가 있고 어떤 폭력은 이제 성인이 된 지금의 시점에서 쌍방 합의 가능한 것으로 아물었음을 확인하는 절차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언제나 이런 식의 책임이 여성-엄마에게 전가된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쁜 엄마>의 홍보 카피 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엄마는 나쁘다’이다. 이것은 자식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악역을 맡아야 하는 양육자의 책임을 의미할 것이다. 동시에 이 문장은 엄마라는 역할은 잘해봐야 본전이고, ‘나쁜 엄마’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음을 함의한다.

경향신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엄마란 위대한 모성이자 숭고한 어머니라는 환상에 치여 일거수일투족을 트집 잡히고, 잘못하지 않아도 “엄마가 미안해”를 외쳐야 하는 신분이다. 영순에게도, 극중 또 다른 엄마로 등장하는 미주에게도 양육의 부담을 함께 나눌 남편이 부재한다. 현실적으로, 아빠는 있더라도 양육의 책임에서는 늘 빠져나가거나 엄마보다 덜 비난받는다. ‘맘충’이라는 혐오 표현은 있어도 ‘대디충’이라는 표현은 없듯이. 어떤 관계든 상처는 남기 마련이고, 주 양육자인 엄마는 나쁘지 않기 어려운 위치이며, 양육은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이다. <나쁜 엄마>는 극적인 상황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재현하고 치유를 시도한다. 현실에서는 당연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꼭 지능이 어린아이로 돌아가지 않아도, 자식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뒤가 아니더라도, 지금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시청자는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영순이나 강호가 되어, 하고 싶었던 말 또는 오래 꼭꼭 묻어두었던 사과를. 상대가 아니라, 그 시절에 갇혀 있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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