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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단독]'北 곡물통제' 문건 입수…"김정은 체제 붕괴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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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곡물유통 국가 독점" 北 지침서 입수

反시장 양곡전매제 복원…식량난 해결 난망

'장마당 딜레마' 빠진 北…"체제 붕괴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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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당국이 '장마당'을 통제하고 모든 곡물 거래를 독점하겠다는 지침을 주민들에 배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양곡을 틀어쥐고 공급 안정화를 노린다는 의도지만, 시장 통제로 식량 조달에 차질을 빚으면서 오히려 식량난이 가중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2일 아시아경제가 샌드연구소를 통해 입수한 '량곡판매에서 나서는 법적요구를 철저히 지킬데 대하여' 제하의 9쪽 분량 문건에는 북한 당국이 양곡판매소를 통해 곡물 유통을 독점하겠다는 방침이 담겼다. 지난해 말부터 북한이 식량 통제를 강화하는 동향이 포착됐지만, 직접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해당 문건은 인민보안성이 각 지역에 배포·교육한 뒤 수거한 자료로 알려졌다.

북한은 주민들을 교육하거나 장악력을 높이고자 할 때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인용한다. 이번 문건에도 김정일의 교시가 글머리에 인용됐다. 다만 김정일이 "양곡을 국가가 장악하되 '분배'하라"고 했던 것과 달리 현재 북한의 지침은 당국이 주민에게 돈을 받고 곡물을 팔겠다는 것이어서,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부족하다는 반증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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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에는 "국가는 량정(식량 정책)을 틀어쥐고 량곡에 대한 중앙집권적인 관리제를 철저히 실현해 나간다"며 "량곡은 량곡판매소 또는 량곡을 팔도록 국가의 승인을 받은 식량공급소에서만 판매할 수 있다"고 명시됐다. 이어 "일부 시·군 상업봉사망에서 자기 단위 리익만을 추구하면서 국가의 법은 안중에도 없이 량곡을 비법적으로 구입하여 망탕 판매하고 있다"며 "이러한 현상들은 크든 작든 국가의 량정 규률을 문란시키고 경제강국 건설을 저애(방해)하는 위법행위"라고 규정했다.

당국이 개인 거래를 통제하고 직접 곡물을 판매하겠다는 지침은 식량 공급체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존의 식량공급소에서 곡물을 국정 가격에 판매해왔지만, 치솟는 쌀값을 잡기엔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 유통되는 양곡까지 당국이 쥐고 분배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양곡을 모두 동원하라는 지시도 담겼다. "여유 량곡 원천을 빠짐없이 동원해야 한다"며 농장 생산분부터 주민들이 개별적으로 조성한 양곡까지 거둬들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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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지침을 어길 경우 처벌도 명시됐다. ▲양정사업소 밖의 기관·기업소·단체 등이 판매를 목적으로 양곡을 구입·보관·수송·판매하거나 ▲양곡판매소에서 판매 대상이 아닌 기관·기업소·단체에 양곡을 판매하거나 ▲양곡 판매로 조성된 자금을 망탕하는 등 경우에는 형사적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행정처벌법 제75조 및 형법 제103조에 따라 무보수 노동처벌이나 노동단련형(노동단련대 6개월~1년 수용) 등에 처한다고 경고했다.

최경희 샌드연구소 대표는 "독재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북한 지도부에게 '식량 배급'은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것"이라며 "이 때문에 사회주의 배급제를 상징하는 기존의 식량공급소를 없애지 않고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양곡판매소를 통해 곡물 유통을 모두 틀어쥐겠다는 것은 기존의 공급체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은 "장마당에서 나타난 독점, 매점매석 등 부작용을 막고 당국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며 "결국 이런 방침은 당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식량을 찾아내려는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식량난 속에 지도부가 먼저 살겠다고 주민들의 식량까지 빼앗는 반인민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식량난 가중으로 아사"…쌀 수입 늘려도 '역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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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청소년들이 꽃제비 시절 경험담을 선보인 연극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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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코로나19 여파에 지난해 봄 가뭄, 여름 수해를 내리 겪으면서 식량난이 심화됐다. 김정은 정권이 꺼낸 새로운 통제 카드는 시장을 단속하면서 치솟는 곡물의 수매 가격을 잡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이런 방침으로 시장이 위축되면서 오히려 식량난이 가중된 것으로 평가된다. 개인 간 곡물 거래가 제한되자 장마당을 통한 식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고, 장마당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주민들의 소득원까지 끊긴 탓이다. 당국이 시장보다 쌀을 싸게 팔아도 살 돈이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은 '구매 제한'도 문제로 꼽았다. 한 소식통은 "양곡판매소라고 식량을 무조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많아야 1인당 5㎏ 정도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1인분을 쌀 200g으로 계산하면, 4인 가족 기준으로 끼니마다 800g이 필요하다. 하루 두 끼만 먹어도 1.6㎏, 한 달에 48㎏이다. 4인 가족에 할당된 20㎏으로 턱없이 부족한 것. 추가 식량은 결국 비싼 값에 사야 하며, 기존의 식량공급소도 곡물이 모자라 군인 등으로 대상이 제한된 지 오래라고 한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중국에서 장립종 쌀까지 들여오기 시작했다. 안남미로 불리기도 하는 장립종 쌀은 찰기가 없고 형태가 긴 품종으로, 동북아 일대에서 선호도가 높은 단립종 쌀에 비해 단가가 낮다. 중국 해관총서의 북중무역 세부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올해 1~4월 쌀 8만8000t, 특히 3월에만 4만6771t을 들여왔다. 이 기간 옥수수를 비롯한 전체 곡물 수입량은 12만1000t에 달했다. 그러나 대중 수입량을 아무리 늘려도, 공급 부족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고난의 행군' 이겨낸 장마당…北 지도부엔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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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양강도 혜산시의 장마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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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제는 북한 당국에 장마당이 '딜레마'라는 점을 시사한다. 시장을 통해 체제가 가진 비효율 문제를 완화할 수 있지만, 자유롭게 개방하면 지도부가 쥔 경제적 독점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가 오가는 장소라는 점에서도 큰 부담이다. 이런 장마당에서 매점매석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당국의 장악력이 약화됐다는 신호다. 코로나19 이후 3년 넘게 국경 및 지역 봉쇄를 이어온 상황에서 시장까지 계속 틀어막을 경우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마당은 '고난의 행군' 시절 배급제가 무너지면서 인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시장이다. 시장이라는 개념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부합하지 않는 요소지만, 장마당을 탄압했던 김정일 시대와 달리 김정은 정권 들어서는 장마당이 꽤 활성화됐다. 통일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북한 당국이 승인한 공식 시장은 414곳에 달하며, 시장 1곳당 인구 6만1831명을 담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비공식 시장까지 합치면 500곳을 훌쩍 넘길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 지도부는 이미 장마당 통제에 실패한 바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5년 시중에서 거래되는 모든 식량을 당국이 장악한 뒤 시장보다 싼 값에 공급하는 '양곡전매제'를 도입했지만, 오히려 곡물 가격이 올랐다. 당시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배급 체계가 무너지자, 나름의 경제개혁을 시도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김정은이 이미 실패한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퇴보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회주의 실패, 경제개혁 실패…'체제 붕괴'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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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과 후계자 신분이던 김정은 국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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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전매제 복원 시도는 실패할 공산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북한 인구의 절반은 MZ세대 격인 '장마당 세대'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1990년대에 태어나 제대로 된 배급을 경험하지 못했고 장마당에서 자생했다. 당국이 인민을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자본주의까지 맛본 세대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결국 외부 도입량을 대폭 늘릴 수밖에 없는데 외화 부족으로 이마저도 어렵다"며 "조만간 암시장이 다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념적 명분을 잃었다는 점에서 '체제 붕괴'의 신호탄이라는 관측도 있다. 당국이 곡물을 독점한 뒤 인민에게 '돈'을 받고 판매하는 행위 자체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입수된 문건에서 김정일의 교시로 명분을 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머리에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나라의 모든 량곡 원천을 국가가 빠짐없이 장악하고 국가적인 량정체계에 따라 분배·소비하는 강한 규율과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고 썼다.

최경희 샌드연구소 대표는 "김정일의 교시까지 끌어왔다는 것은 새로운 정책에 명분이 없다는 방증"이라며 "사회주의는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는 대신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 기본 이념인데, 인민에게 돈을 받고 곡물을 파는 행위는 자본주의적 요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김정은 정권은 생산수단부터 결과물까지 독점하면서 생산 과정에 필요한 노동력만 착취하고 있다"며 "당장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진 않겠지만, 체제가 점차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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