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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책&생각] 저 폭력을 기록하고,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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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한겨레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어느 여성 청소노동자의 일기

마이아 에켈뢰브 지음, 이유진 옮김 l 교유서가(2022)

한겨레

중학생이 되면서 매일 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6년간 꾸준히 일기를 쓴 학생에게 학교에서 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을 받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에 시작한 일기를 어느덧 40년째 쓰고 있다. 세월이 흘러 종이 일기장에 쓰던 것을 이제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린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기 때문에 ‘호모 나란스’(Homo Narrans)로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야기로 지식과 정보를 얻고, 이야기를 통해 삶을 재구성하고, 이야기하며 산다. 자아, 즉 정체성(내가 생각하는 ‘나’)이란 별도의 무의식적 공간에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뒤범벅된 모든 경험과 사건들을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때로 너무 중요한 기억은 시간과 세월의 마모 속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하거나 스스로 기록으로 남기는 되새김질을 통해 새롭게 응집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를 쓰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삶을 부여잡는 일이다. 일기는 때로 역사가 되기도 한다. 이순신은 녹둔도 만호 시절 당했던 억울한 일을 증명할 방법이 없자 그때부터 일기를 썼고,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는 동안의 이야기를 일기로 썼다.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는 1918년 스웨덴 중서부 칼스쿠가에서 태어나 홀로 다섯 남매를 키우며 여성 청소노동자로 살았던 마이아 에켈뢰브가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그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야간 수업을 들으며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자신처럼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일, 노동과 여성, 세계정세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이 책의 첫머리는 ‘1953년 한국의 위기’에 관한 것이었다. 에켈뢰브 자신도 아동복지 담당공무원에게 아이의 겨울옷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쏠리는 절박함을 적고 있다.

이야기하기는 우리 삶에 의미와 안정을 주는 일이자 동시에 변화를 촉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에켈뢰브는 1966년 2월8일의 일기에서 스웨덴 총선에 관한 고민을 적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정당 토론과 홍보물을 읽고, 어느 정당에 투표해야 할지 고민하며 “나중에 스스로에게 화를 많이 내거나 총선일 투표 마감 때 닥치는 대로 투표하겠지”라면서도 “기회가 되는 대로 정당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정당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등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할 것이다”라는 결심을 적었다.

우리는 기대와 어긋난 충격적 상황이나 모순적인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에도 말문이 막힌다. 내게는 2023년 5월31일이 그런 날이었다. 그날의 일기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오늘은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 2009년 쌍용자동차 시위 강경해산, 2015년 11월14일 백남기 농민에게 쏟아졌던 물대포와 더불어 국가공권력이란 이름 아래 무도한 정권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 쓰는 노동자의 머리 위로 몽둥이찜질을 가한 날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든 사람이 나쁜 정치를 거부하면 나쁜 정치는 망한다면서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라고 했다.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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