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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녹색세상] 생존당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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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미국 작가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북부, 워싱턴, 오리건주가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여 ‘에코토피아’라는 이름의 생태자치공화국을 꾸리며 살아간다는 내용의 공상 소설을 발표한다.

경향신문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승용차를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재생에너지로 대부분의 활동을 뒷받침하며 성평등과 자연 존중, 공유경제의 삶을 누리는 이 나라의 모습은 미국에서 온 기자에게 경이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람들은 버젓하게, 오히려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칼렌바크는 6년 뒤인 1981년에 이 독립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고 성공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프리퀄 <에코토피아 비긴스>를 발표한다.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돼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들어 올릴 때였지만 소설에서는 다른 정치가 시작되고 있다. 공기와 먹거리가 오염되고 핵발전이 위험에 처하는 와중에도 연방정부는 군사주의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정치는 적절한 대응을 하기는커녕 문제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화학공장의 독성물질에 피해를 입은 암환자들이 특공대를 만들어 저항에 나서고, 태양광 에너지를 연구하고 숲의 보전을 고민하는 이들은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결심한다. 탈중앙집중, 환경주의, 민중주의를 표방하는 풀뿌리 정치 플랫폼 ‘생존주의자의 당(Survivalist Party)’이 결성돼 본격적으로 독립을 호소한다. 수많은 위기를 거치면서 생존당은 지지자를 늘려가고 마침내 미국의 정치·경제와 결별하게 된다.

이 스토리와 비교한다면 아마도 우리 정치의 미래는 흔한 공상과학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들에 근접하고 있을 것이다. 10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내년 총선에서 필경 펼쳐질 광경은 더 나쁘거나 용서하지 못할 최악과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차악 사이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그림일 것이다. 제1당과 2당 그리고 3당까지도 이대로 총선을 치르면 필패라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고 일정한 개편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런 기본 구도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최악을 피하는 것은 중요하며 가장 나쁜 선거 결과가 가져올 후과를 우리는 익히 경험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현실 정치에서 ‘생존’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번 국회는 2020년 9월 최초로 ‘기후위기 비상 대응 촉구 결의안’을 반대표 없이 통과시켰지만, 5개월 뒤에는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고 기후재난에 취약할 것이 뻔한 신공항 특별법을 1당과 2당의 합의로 만들었다. 탄소중립을 다루는 기본법에 ‘녹색성장’이라는 수식어 유지에 합의해준 것도 이 두 당이다. 환경규제 완화의 도미노를 일으킬 강원특별법 전부 개정안을 발의하고 동의해준 171명의 의원들 역시 두 당의 사람들이다. 국민동의 청원을 통해 국회로 전달된 탈석탄법 제정안은 8개월째 상임위에서 진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이 희생당한 뒤 사고 현장의 카메라 앞으로 달려가는 의원들은 많지만 우리의 생존을 미리 염려하고 탄소중립의 실현을 위해 진지하게 분투하는 의원들은 거의 없다. 원내외의 진보적 소수정당들 역시 안타깝게도 생존당만큼의 결기와 포부는 없어 보인다. 의원 선출 방식을 놓고 장기알 몇 개를 넣고 빼는 선거제도 개혁으로 우리는 정말 생존할 수 있을까?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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