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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중화제국의 진격 멈춘 곳, 새로운 땅 찾아 나선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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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화교는 어떻게 뿌리내렸나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개방’에서 ‘개방’을 대표하는 것이 경제특구다. 1979년에 최초의 특구로 지정된 것은 선전(深圳)·주하이(珠海)·샤먼(廈門)·산터우(汕頭) 네 곳이었고, 상하이(上海)·톈진(天津) 등 14개 지역이 추가된 것은 5년 후의 일이다.

최초의 4개 특구 중 선전과 주하이는 홍콩, 마카오와 연계된 곳이다. 그런데 동남해안의 샤먼과 산터우는? 상하이나 톈진에 비해 중국의 산업구조에서 비중이 훨씬 작은 이 도시들이 먼저 특구로 지정된 까닭은 동남아 화교사회와의 관계에 있었다.



중국 동남부 해안지역 출신 많아

밀무역하다 동남아로 속속 이주

토착 권력, 유럽 세력과 잘 섞여

나무덩굴처럼 은밀히 실력 배양

오랜 세월 ‘국가’와 불편한 관계

“위험은 피하라” 실용주의 키워

10세기부터 동남아 진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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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창이공항의 시세이도 삼림계곡. 2019년 준공됐다. 공간 설계의 끝판왕이라 할만하다.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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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동남아 이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농업의 확장에 따른 이주였다. 황하 유역에서 출범한 중국의 농업문명은 춘추-전국시대에 장강 유역으로, 남북조시대 이후 중국 남해안으로 넓혀진 데 이어 10세기경부터 동남아로 퍼지기 시작했다.

교역의 확장에 따른 이주도 10세기경 시작되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남아시아(인도), 서남아시아(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교역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항로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맡는 중국인 집단이 나타난 것이다. 15세기 초 정화(鄭和)의 항해 때 이 집단의 존재가 확인된다.

정화 함대는 남양(남중국해-인도양) 교역을 조공무역 형태로 정리하려 했다. 제국의 해양 방면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었다. 명나라가 이 길을 포기하자 교역은 밀무역 형태로 진행되었고, 그 확대에 따라 동남아 각지에 중국인 집단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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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중국인(왼쪽)-말레이인(가운데)-인도인 여성이 함께 찍은 1890년경의 사진. 싱가포르에서 7월 21일은 ‘종족 화합의 날’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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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중국의 은(銀) 수입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커진 밀무역은 ‘왜구’의 형태로 나타났고 타이완의 정성공(鄭成功) 세력으로 이어졌다. 1680년대 타이완 평정 후 밀무역 세력은 동남아 각지로 퍼져나갔다. 여러 가지로 나타난 동남아 중국인 집단의 모습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이 18~19세기 보르네오의 ‘공사공화국(公司共和國, Kongsi Republic)’이다.

‘공사’는 ‘회사’의 뜻으로 지금은 쓰는 말이지만, 화교사회에서는 ‘조직’의 뜻으로 쓰였다. 혈연이나 지연의 모임을 ‘회관(會館)’이라 했고 그중 규모가 큰 것을 ‘공사’라 했다.

유럽인이 놀란 민주적 공사(公司)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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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네오 원주민 중 하나인 다야크족의 탈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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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8세기부터 동남아 지역에 알려졌으나 이슬람 통치의 확산은 1400년경 말라카 술탄국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교역의 확대가 그 배경이었고, 대부분 술탄국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정화 함대가 동남아 이슬람화를 촉진했다는 학설이 흥미롭다. 정화가 팔렘방에서 무슬림인 시진경(施進卿)에게 힘을 몰아준 일이 떠오른다.

술탄국들도, 16세기부터 이 지역에 진출한 유럽인들도, 교역로에 관계되는 항구와 해안지대에만 관심을 쏟았다. 면적이 한반도의 세 배가 넘는 보르네오의 내륙은 늦게까지 오지로 남아 있었다. 유럽인들은 이곳을 식인종이 우글대는 최악의 야만 지대로 상상했다.

18세기에 보르네오 내륙의 금광과 주석광산이 개발되면서 지역 술탄들이 중국인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광산을 중심으로 농지를 개간해 경제적 자립성을 확보하면서 인근 술탄국과의 교섭을 통해 정치적 자립성도 키워나갔다. 이슬람의 ‘통치’ 개념은 영토가 아니라 인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술탄국의 양보가 어렵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보르네오 내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유럽인들에게 이 공사들의 존재가 놀라운 현상이었다. 각급 지도자를 선거로 뽑는 ‘민주적’ 정치방식을 이 야만 지대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 사이에 서부 보르네오에는 국가조직에 가까운 중국인 공사가 여럿 나타났다.

자료가 그중 잘 남아있는 란팡공사(蘭芳公司·1777~1884)를 보면 정치 수준이 당시 어느 국가에 못지않았다. 란팡공사는 1822~1824년, 1850~1854년, 1884~1885년, 세 차례 전쟁 끝에 해체되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보르네오(남부) 지배가 완성되었다.

생존의 기술 ‘시선을 피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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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가운데)가 2000년 윌리엄 코언 미 국무장관과 만나는 모습. 1990년 수상직 퇴임 후 그의 명망이 더 높아진 것은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약화 때문일 것 같다.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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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시그레이브는 『변방의 영주들』(1995)에서 화교사회의 특징 하나를 ‘시선을 피하는 능력(invisibility)’으로 꼽는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이 동남아에서 기존 세력을 격파하고 지배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화교사회를 큰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유럽 세력의 통치 아래 화교사회는 계속해서 힘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우리 속담을 시그레이브가 들었다면 크게 공감했을 것 같다.

화교들은 교목을 휘감는 덩굴처럼 현지 정치권력을 둘러싸고 은밀히 실력을 키웠다. 정복하러 온 유럽인의 눈에는 쓰러트릴 대상으로 왕과 술탄들만 보였다. 화교들은 새 지배세력을 휘감고 자기네 생태를 이어갔다. 보르네오의 공사공화국들은 화교사회가 직접 정치권력을 운용한 예외적 사례다. 워낙 오지라서 휘감고 기댈 교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경제특구 중 푸젠성의 샤먼과 광둥-푸젠 경계의 산터우는 가장 많은 화교를 내보낸 지역의 중심도시다. 이 도시들이 자리한 동남해안 지역은 송나라 때 마치 식민지처럼 개발된 곳이었고, 서방 교역이 활발하던 원나라 때는 번영을 누리다가, 명-청 시대의 해금(海禁) 정책으로 손발이 묶인 곳이다.

명-청 시대에 동남 지역 사람들은 공식적 ‘출세’의 길이 좁았다.(조선시대 ‘서북인’과 비슷한 처지였다.) 그들은 역량을 밀무역 등 법외(法外)사업에 쏟았다. 국내에 살면서도 국가체제와 거리를 두고 자기네 질서체제를 병행했다. 해외에서 좋은 활동-생활 조건을 누릴 길이 있으면 주저 없이 떠났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국가와의 불편한 관계 경험이 해외 화교에게 중요한 자산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무조건 충성하거나 목숨 걸고 저항하는 대신 이용할 기회를 찾되 손해의 위험을 피하는 냉정한 자세. 중화제국을 상대로 다듬어 온 이 유연한 자세가 동남아 화교가 현지 권력을(토착세력이든 식민세력이든) 상대하는 기본자세가 되었다.

‘화교의 나라’ 싱가포르의 번영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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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를 받는 재간』과 『통치를 피하는 재간』. 국가의 역할에 관한 새로운 연구 동향을 보여주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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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가 화교사회 번영의 대표적 현장이 된 것은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활발한 시기에 건설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적도 부근 말레이반도 끝의 이 섬에(서울과 비슷한 면적) 영국동인도회사 기지가 설립될 때(1819) 인구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싱가포르를 둘러싼 말레이시아 인구의 중국계 비율이 약 22%인 데 비해 싱가포르는 약 75%인 ‘화교의 나라’다.

영국 지배 아래 싱가포르의 성장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교통의 요지라서 대영제국의 자원이 투입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영국이 물러날 때 말라야연방에 참여했다가(1963) 2년 후 연방에서 쫓겨나 진짜 ‘독립’을 강요당한 후, 자원도 없고 배경도 없는 이 도시가 세계적 ‘지상낙원’으로 발전한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싱가포르 번영의 원인으로 빠트릴 수 없는 것 하나가 리콴유(1923~2015)의 지도력이다. 독립 전의 자치 단계부터 31년간(1959~1990) 수상직을 지키는 동안 외부 평가가 크게 엇갈린 인물이다. 경제적 성공은 찬양을 받았지만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바로 이 엇갈림 속에 성공의 진짜 원인이 있었던 것 아닐까. 리콴유의 노선은 화교사회의 실용주의를 대표한 것이었다. 민족주의든 민주주의든 특정 관념의 지배를 꺼리는 실용주의다. 독립 대신 말라야연방에 참여하려 애쓴 것도, 4개 공용어(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영어) 중 영어를 대표공용어로 삼은 것도, 모두 이 실용주의의 표현이다.

국가와의 불편한 관계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용주의다. 마이클 소니가 중국 동남해안 지역의 사회사를 다룬 『통치를 받는 재간(The Art of Being Governed)』(2017)은 제임스 스콧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에 짝을 맞춘 제목이다. 두 책 모두 국가를 대하는 인민의 탄력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개혁개방기의 중국에 싱가포르가 준 도움에는 자본 유입만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에 대한 실용주의적 가르침도 있었을 것 같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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