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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육하원칙도 없었다, “대피하라” 다짜고짜 날아온 재난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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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도발에 ‘경보대응 시스템’ 구멍

조선일보

북한이 31일 오전 6시 29분 서해 백령도 방향으로 발사체를 발사한 이후 벌어진 상황은 안보 위기에 대응하는 우리 경보 시스템의 취약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합참이 행정안전부에 ‘백령도 경계경보 발령’을 요청하자 행안부는 이를 실행하면서 17광역시·도에도 ‘상황 전파’ 지령을 전달했다. 그중 서울시만 유일하게 위급 재난 문자로 ‘경계경보’를 발령했는데, “행안부 지령부터 모호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서울시의 ‘경계경보’ 문자도 북한 발사체에 대한 언급 없이 ‘대피를 준비하라’고만 돼 있었다. 육하원칙 중 ‘왜’가 빠졌다. 이후 서울 시내 구별로 총 176곳에서 확성기로 경보 방송을 했는데, 듣지도 못했다는 시민이 많았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보안이나 전술적 이유가 아니라면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줘야 정확히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합참, 백령도에 ‘경계경보’ 요청

합참은 이날 오전 6시 29분 북한의 발사체 발사 직후 상황을 행안부에 전달하며 “백령도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하라”고 요청했다. 발사체가 내륙 쪽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행안부는 즉시 백령도 지역에 ‘오늘 6시 29분 백령 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위급 재난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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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했던 행안부 ‘지령’

행안부 중앙통제소는 1분 뒤인 오전 6시 30분 전국 17광역시·도에 “현재 시각, 백령면·대청면에 실제 경계경보 발령. 경보 미수신 지역은 자체적으로 실제 경계경보를 발령”이라는 지령을 발송했다. 각 시·도 상황실에서는 이 ‘상황 전파’ 지령이 전달되면서 비상음이 울렸다.

서울시는 이를 ‘경보 발령’ 지령으로 판단해 오전 6시 41분 ‘경계경보’ 문자를 시민에게 발송했다. ‘오늘 6시 32분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행안부는 오전 7시 3분 ‘서울시가 경계경보를 오(誤)발령했다’는 안내 문자를 시민들에게 보냈고, 서울시는 7시 25분 ‘경계경보 해제’ 문자를 발송했다. 행안부는 백령도에 국한되는 지령을 서울시가 잘못 해석했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행안부 지령이 불명확한 측면이 있다”며 “협력 대응 체제의 허점이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날 오후 1시쯤 기자회견을 열고 “혼란을 드려서 죄송하다”면서도 “이번 긴급 문자는 현장 실무자의 과잉 대응일 수는 있지만 오발령은 아니었다고 판단한다”고 했다.

◇'왜’가 없는 경보… 포털 접속 폭주

이날 서울시의 문자에는 ‘경계경보가 발령됐으니 대피 준비를 하라’는 내용만 있었다. 백령도에도 같은 문자가 갔지만, 인구 942만명인 서울에서 이런 문자가 경보음과 함께 전송된 것은 상황이 아예 달랐다. 그 문자메시지에는 경보를 발령하는 이유, 어떻게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이 때문에 네이버는 물론 정부가 운영하는 국민재난안전포털과 안전디딤돌 앱에도 서울 시민의 접속이 폭주하면서 서비스가 지연됐다. 반면 일본 정부가 이날 자국민에게 보낸 경보 메시지에는 ‘북 미사일 발사’ ‘건물 안이나 지하로 피난’ 등 핵심 정보가 담겼다.

현재 ‘민방위 매뉴얼’에는 상황별로 정부가 발송하는 표준화된 문자메시지 유형이 있다. 하지만 북한의 발사체 도발에 대응하는 문자 유형은 없다. 제진주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그동안 북한의 수많은 미사일 도발이 있었음에도 민방위 수칙은 그냥 방치돼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날 서울시는 대응 지침에 따라 서울 전역의 민방위 스피커 176개로 사이렌을 울리고 대피 안내 방송도 했다. 시민에게 위기 상황을 전파하고 대피를 준비하게 하는 최종 단계였지만 방송을 듣지 못했다는 시민이 더 많았다. 방송이 나와도 스피커가 고장 나 정확한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동작구의 김건영(32)씨는 “선거운동 차량이나 과일 트럭 방송은 잘만 들리는데, 정작 생명과 직결된 민방위 안내 방송은 하나도 안 들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경기도에서도 서울시의 ‘경계경보’ 문자를 받은 일부 주민의 문의가 쏟아졌다. 이날 새벽 30분 동안 경찰서와 소방서에 신고와 문의만 수백 건이 들어왔다.

[최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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