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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안호기 칼럼] 한국 경제, 고성장 과거를 잊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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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심상치 않다. 한국은행이 지난 25일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0.2%포인트 내린 1.4%로 조정했다. 전망치를 1.1%까지 낮춘 기관도 있다. 대표적 경제지표인 성장률이 낮아진다는 건 경제 전체의 활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기업 매출과 고용, 개인소득 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2월 이후 4개월째 경기둔화가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심각한 것은 경기순환 사이클의 한 국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가 구조적 장기 침체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향신문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수출은 더 이상 한국 경제 버팀목이 아니다. 관세청 자료를 보면 5월1~20일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6.1% 감소했다. 수출은 8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 무역수지는 15개월 연속 적자가 확실시된다. 10대 수출품목 중 지난해보다 수출이 늘어난 품목은 자동차뿐이다. 2000년 이후 줄곧 흑자였던 대중국 무역수지는 올 들어 4월까지 101억526만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가계부채가 역대 최대폭 감소했다는 한은 발표가 있었지만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 1분기 가계신용 잔액은 전 분기에 비해 13조7000억원(0.7%) 줄어든 1853조9000억원이었다. 여기에 한국에만 있는 제도인 전세 보증금 1058조원을 합하면 실제 가계부채 총액은 3000조원에 근접한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다.

금리 상승으로 대출이자를 갚지 못하는 사람이 늘면서 연체율마저 오른다. 지난 3월 말 기준 은행 연체율은 0.33%로 3개월 새 0.08%포인트 상승했다. 서민이 많이 이용하는 저축은행 연체율은 1.66%포인트 급등한 5.07%였다. 오는 9월 말에는 코로나19 상환유예 대출 상환이 시작된다.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 등에 상환을 미뤄준 대출 5조3000억원은 부실 우려가 크다.

외부 환경도 나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 장기화로 국제 원자재값은 고공행진 중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스위스 크레디트스위스(CS) 파산 위험에서 촉발된 금융위기 우려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취약계층의 고통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계층에 빌려주는 ‘소액생계비대출’은 연 15.9% 고금리에도 출시 한 달 만에 2만5000여명이 몰렸다. 대출 용도는 병원비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올해 1분기 해외여행객은 497만9386명이었다. 지난해 1분기의 10배 넘게 폭증했다. 병원비가 모자라 안절부절못하는 가난한 사람과 코로나19 통제가 풀리자 해외여행을 떠나는 부자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양극화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는 지난 30년간 가파른 성장을 거듭했다. 천연자원이 없어도 인적자원 투자가 성공적이었고, 낮은 원자재 가격과 중국 시장 확대에 힘입어 활황을 맛봤다. 저금리를 이용해 부채를 지렛대 삼아 경제 규모도 팽창했다. 세계 각국은 한국 경제를 모범생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수출과 산업구조, 금융 등 경제 전 영역에서 익숙했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성장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1%대 성장도 장담하기 어렵다. 세계 최고 속도의 인구 감소는 2030년대부터 잠재성장률을 0%대로 떨어뜨리고, 2050년대 이후 마이너스로 추락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스턴대학원 명예교수는 올해 초 펴낸 <초거대 위협>에서 부채, 생산인구 감소, 저금리, 금융불안 등 10가지 위협을 제시했는데, 한국은 사실상 모든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루비니 교수는 최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초거대 위협을 해결하려면 정부의 대응과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루비니 교수는 “교육과 건강관리, 연금 등 공공서비스나 부의 불균형을 최소화하려는 정책을 제공하는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면서 “인류의 미래가 디스토피아 또는 유토피아 시나리오에 도달할지는 국가 및 국제적 정책 조치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성장이 사실상 한계에 이르렀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른바 ‘잘나갔던 과거’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생산량만 늘리는 성장을 꾀할 게 아니라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정부는 최근 경기둔화 속에서 성장에 매달리느라 감세와 공공서비스 축소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장래에 불균형 심화와 민생 파탄이라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길이다. 정부뿐 아니라 기업, 가계도 성장정체 시대에 걸맞은 새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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