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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특파원 칼럼] 착잡한 외국인 가사도우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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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12년 전 홍콩과 싱가포르의 이주 가사노동자 정책 비교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만난 할리마 야콥 노동조합연맹(NTUC) 사무총장(현 싱가포르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도입된 이주 가사노동자(MDW) 정책이 성공적으로 안착됐다고 평가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경향신문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지금까지도 싱가포르에선 주 1회 휴식 보장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6개월 주기로 임신 여부와 HIV/AIDS, 성병 검사를 실시해 임신했거나 양성 반응이 나오면 즉시 추방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비하면 홍콩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그나마 나은 상황에 놓인 듯했다. 적어도 일요일 하루는 휴가를 쓸 수 있었고, 표준근로계약에 따라 최소한의 급여 및 고용 안정성도 보장됐다. 가사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조합도 존재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필리핀·인도네시아) 출신 여성 이주자이자 사적 영역(가정)의 피고용인’이라는 지위로 인한 열악한 삶은 어디서든 비슷했다. 일요일마다 가사노동자들의 해방구로 변하는 센트럴 쇼핑몰 주변 공터와 빅토리아파크 등에서 만난 이들은 처음에는 본국의 가족들에게 번 돈을 송금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하더니 점차 속내를 털어놓았다. 임금체불, 중개업체의 수수료 갈취는 예사였고, 폭언·폭력 등 고용인의 ‘갑질’에도 계약 해지 우려로 문제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한 여성은 약속과 달리 독립된 방을 제공받지 못해 수년간 세탁실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회고했다.

10년도 더 지난 내 경험이 떠오른 것은 지금 한국에서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돌연 저출생 해법으로 논의되는 과정이 씁쓸함만 자아내고 있어서다. ‘월 100만원을 지급하자’는 내용의 법안으로 논란에 불을 지핀 어느 정치인은 외국인 가사노동자를 최저임금법 적용에서 제외되는 가사사용인으로 간주하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11년 제정, 2013년 발효된 국제노동기구(ILO) 가사노동자 협약이 보여주듯이 가사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다. 용어를 바꾸고 신분을 달리한다고 해서 노동자가 노동자 아닌 존재가 돼 노동권을 박탈당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올해 하반기부터 시작될 정부 시범사업도 ‘외국인 가사도우미=노동자’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저출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파격적·한시적 해법이라고 주장해도, ‘주요 8개국(G8)’ 진입을 노린다면서 인권을 부정하고 국제기준을 무시하는 국가는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또 어느 부모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도우미에게 아이를 맡기고 안심할 수 있을까.

돌봄의 비용과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출산과 육아를 결심하게 할 순 없다. 일을 병행하면서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닐 바에야 차라리 아이 갖기를 미루거나 아이 없이 살겠다는 부부가 늘고 있다. 저출생 해결을 위한 정공법은 일하는 부모도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부모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것이어야 한다.

김유진 워싱턴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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