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송혁기의 책상물림] 거리낌 없음에 대하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은밀한 곳이 가장 잘 드러나며 미세한 일이 가장 잘 나타난다.” 광장에서 거창하고 시끄럽게 벌어지는 사건보다 독방에서 소리 없이 하는 일이 더 잘 드러난다는 말이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유가 경전의 하나인 <중용>에 나온다. 남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조심하라는 ‘신독(愼獨)’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신독이라는 말을 꺼내기 무색할 정도로, 밀실은 물론 남의 이목에 훤히 드러나는 자리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많다. 거리낌 없는 솔직함이 미덕이고 거리낌 없는 당당함이 선망되는 시대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떳떳하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유로워서라면, 거리낌 없음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일이다. 다만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을 하면서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해서 거리낌 없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강희맹은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서 뱀 잡아먹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두 명이 뱀을 잡아먹기 시작하자 다들 손가락질하며 사람으로 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뱀 잡아먹는 사람이 늘어나자 고을 사람들이 그 풍습에 점차 물들어 갔고, 결국 중독되어 죽는 이들이 나오는데도 그치지 못하게 되었다. 강희맹은 뱀을 흉측하게 여겨 피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어떻게 고을 사람 모두가 그렇게 되었을까 의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이렇게 추정했다. “처음에 누군가가 ‘뱀도 어패류의 하나일 뿐이며, 기름지고 향도 좋은 데다 주변에서 잡기도 쉬우니 굳이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라며 권하기에 한번 먹어보니 나쁘지 않았고, 마음에 익숙해져 가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너도나도 젖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이미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있다면, 처음 시작되던 순간에 그럴 듯한 자기합리화 논리로 한번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후 점차 익숙하게 젖어들며 거리낌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뱀 잡아먹는 풍습이야 문화의 다양성으로 이해할 수 있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지만,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면 이는 자신과 주변을 곤경에 빠뜨리고 말 것이다. 은밀하고 미세한 것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삼성 27.7% LG 24.9%… 당신의 회사 성별 격차는?
▶ 뉴스 남들보다 깊게 보려면? 점선면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