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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기고] 문체부는 출판 생태계를 망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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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출판사에서 양서를 직접 구입해 전국 도서관에 배포하는 세종도서 선정 사업을 펴오고 있다. 더러 베스트셀러도 포함되지만 대부분은 학술적 가치가 높은 다양한 책들을 선정해 도서관에 배포한다. 세종도서 선정 사업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84억원의 예산을 들여 1000종 가까운 책(세종도서)을 선정해 전국 도서관에 보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체부는 지난 21일 오전 10시 예정에 없던 보도자료를 냈다. 세종도서 선정 심사가 부실투성이인데다 공정성을 잃어 구조적으로 개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경향신문

신정민 한국출판인회의 정책위원장


출판 관계자들은 문체부의 올해 세종도서 사업 시행 공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년 같았으면 응모를 마치고 세종도서 선정 심사에 착수해야 할 시기다. 한데 문체부는 구체적인 이유 없이 사업 시행을 미루더니 일요일 아침에 세종도서 사업 개편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이다. 일부 언론은 문체부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베껴 쓰는 데 분주했다.

세종도서 선정 심사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곤욕을 치른 문체부는 세종도서 선정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민간단체와 논의를 거쳐 심사 절차를 개편했다. 문체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그 역할을 맡았고, 여러 민간단체가 세종도서사업운영위원회를 꾸려 사업을 진행해왔다. 민관 협업의 정신으로 탄생한 운영위의 기능과 역할을 싸잡아 폄훼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문체부의 세종도서 선정 심사 개입은 자제되어야 마땅하다.

세종도서 선정 사업이 바뀌거나 없어지면 출판계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다.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책을 펴내는 출판사는 없겠지만 오래전부터 출판이 사양산업으로 분류되고, 학문적 효용이 무시당하기 일쑤인 척박한 현실에서 인문·교양·학술 분야의 양서를 발간해온 출판사들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화의 토양이자 지식사회를 이끄는 출판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데 문체부가 앞장서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 하나로 한 나라의 지식산업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문체부는 모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출판은 저자나 학자, 예술가들이 연마해 올린 값진 성취인 동시에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 자산이다. 국내 출판계는 50년 전까지만 해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을 일본어나 영어에 기대어 중역 출판했다. 하지만 지금은 원전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을 믿고 읽을 수 있게 됐다. 인문·교양 서적 출판을 통한 지적 자산이 얼마나 쌓였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선조 때인 1586년 영국에선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생겼고, 다양한 언어권이 이곳에서 출간한 책을 읽으며 자국의 언어로 된 번역본을 펴내고 있다.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2019년 펴낸 <옥스퍼드 핸드북 퍼블리싱>을 보면 전 세계에서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비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한국과 네덜란드이다. 매일 책을 읽는 독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중국이다. 일본의 출판산업은 근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국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중국은 아시아 고전은 물론 고대 유럽의 고전들을 번역하는 사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특히 중국은 자국의 출판물을 수입해 번역하는 다른 나라 출판사에 주는 지원금을 높게 책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핸드북 퍼블리싱>에 따르면 미국·중국·독일·영국·일본·프랑스·인도 등 출판산업 상위 7개국은 전 세계 출판의 70%를 맡고 있다. 출판을 위축시킨 국가는 한 세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사라졌다. 멀리는 시황제의 진나라가 그랬고, 가까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그랬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제4조 2항에 있는 출판진흥 계획은 모두 아홉 가지다. 그중 ‘양서 출판의 장려 및 지원’ ‘국내외 우수 저작물의 번역 지원’ ‘서점, 제본업 등 지원’이 있다.

세종도서 예산으로 책정된 84억원은 출판 지원사업 가운데 압도적으로 큰 규모이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올해 정부가 밝힌 반도체 부문 투자 지원액 1조원의 0.84%에 그치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이젠 인쇄소·제본소·출판사가 문 닫는 일이 너무 흔해 뉴스도 아니다. 지난 한 해에만 종잇값이 70% 넘게 올랐다. 수년째 제자리걸음인 세종도서 지원금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마이너스다.

문체부가 출판지원금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세종도서 선정 심사 체계 개편을 구실로 출판계를 궁지에 빠뜨리려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신정민 한국출판인회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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