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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1000건 중 2~3건 ‘엄마 성’…“결혼 전 아이 성씨 결정에 당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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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6년차 원의림·유성민 부부가 직접 행정절차 밟아보니

경향신문

유성민(왼쪽)·원의림씨 부부가 지난 23일 서울 양천구 자택 인근 공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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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신고서에 ‘성·본 협의서’ 요구
‘모의 성·본’ 신청에 주민센터 혼란
가정 내 평등 가로막는 장벽 실감

정부 ‘부성 우선’ 폐기 계획은 중단
“제도 안 바뀌면 헌소·행소도 검토”

“첫째는 아빠 따라 유씨, 둘째는 엄마 따라 원씨로 하자.”

6년차 부부 원의림씨와 유성민씨는 2018년 결혼을 앞두고 이같이 약속했다. 남편 유씨와 부인 원씨 각자의 성씨를 자녀에게 남겨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혼인신고를 하려고 보니, 자녀는 혼인신고 시점에 정한 하나의 성씨만 따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게다가 부인인 원씨의 성을 따르려면 혼인신고서 내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했는가?’ 조항에 ‘예’라고 표기하고 별도 협의서를 제출해야 했다.

“결혼 전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의 성씨를 꼭 한 명을 따라 확정하라고 하니 당황스러웠죠.” 두 사람은 시대 흐름에 맞춰 혼인신고 대신 출생신고 시 자녀의 성·본을 협의할 수 있도록 민법이 곧 개정되리라 생각했다. 우선 엄마 성씨를 물려주겠다는 서류를 냈다.

절차는 쉽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위해 찾은 구청에는 협의서 양식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다. 구청 직원이 양식을 찾아내 인쇄할 때까지 30분을 기다린 뒤에야 서류를 작성할 수 있었다.

혼인신고로부터 5년이 흐른 지난 4월. 두 사람은 아들의 출생신고를 위해 또다시 1시간을 기다렸다. 출생신고를 하려 주민센터를 찾은 남편 유씨는 ‘혼인신고 때 (자녀 성·본) 협의서를 낸 것이 정말 맞느냐, 증빙자료가 있느냐’는 질문을 들었다. 주민센터 직원은 1시간 동안 여기저기 전화하며 헤매는 모습을 보였고 그런 뒤에야 아들에게 엄마의 성인 ‘원주 원씨’가 붙었다.

당시 산후조리원에 있던 원씨는 남편이 1시간을 기다렸다는 얘기를 듣고선 “행정절차부터 엄마 성을 물려주려는 이들을 별난 사람으로 취급하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유씨는 제도와 행정 현장 모두에서 경험한 걸림돌을 “아빠 성을 따르게 하기 위한 ‘너지(선택을 유도하는 개입)’ ”라고 말했다. “부의 성·본을 기본값으로 두고 모의 성·본은 예외적 상황으로 보니까 (협의서를) 별도로 입력해야 한다. 이런 걸림돌 때문에 사람들이 ‘그냥 우리도 남들 하는 대로 하자’고 정하지 않을까.”

출생신고 시 아빠는 대리인에 불과한 것도 유씨 눈에 밟혔다. 유씨는 “출생신고 때 출생을 신고하는 ‘본인’은 엄마여야 하고 나는 ‘대리인’이라 부인의 신분증을 내야 했다”며 “부의 성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아이에 대한 책임자는 엄마라는 사회적 인식이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호주제 폐지 이후 15년이 지났지만 부계사회의 전통은 여전히 공고하다. 혼인신고 때 엄마 성씨를 따르겠다며 협의서를 제출하는 경우는 전체 신고 1000건 가운데 2~3건 남짓에 불과하다. 부부의 아들이 ‘원씨’라고 하면 대뜸 질문부터 훅 들어오곤 한다. 주로 남편에게 ‘그렇게 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 식이다. 원씨는 “ ‘그거 뭐 중요하다고, 그냥 아빠 성 따르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데 엄마 성을 따라도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다”고 했다.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는 2020년 5월 아빠 성씨를 기본으로 따르는 ‘부성 우선주의’를 폐지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여성가족부도 2025년까지 자녀 출생신고 시 부모가 자녀의 성·본을 협의해 정할 수 있도록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은 현재 추진 중단된 상태다. 법무부는 지난해 10월 부성 우선주의가 위헌인지 심리하고 있는 헌법재판소에 ‘혼인신고 시 자녀의 성·본을 협의하도록 한 것은 위헌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현실에서 ‘가정 내 평등을 가로막는 장벽이 얼마나 촘촘하고 견고한지’ 느꼈던 부부는 엄마 성씨를 쉽고 편하게 따를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원씨는 “사회가 얼마나 다양한 가족을 포용하는지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했다.

둘째에겐 ‘아빠 성’을 물려주고 싶다는 두 사람은 부성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현 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을 내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변호사인 원씨와 국회의원 보좌관인 유씨는 각자 자리에서 다양성을 뒷받침하는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쓸 계획이라고 했다.

글·사진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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