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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평생 무뎌지지 않은 비판·해학… 작가·언론인 최일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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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비판정신 담긴 사실주의 작품세계

신군부 언론 탄압에 해직…칼럼으로도 이름 날려


한겨레

2017년 9월 소설집 <국화 밑에서>를 내고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던 최일남 선생.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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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이자 소설가로 활동한 최일남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이 28일 오전 0시57분에 별세했다. 향년 91.

고인은 1932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이던 1953년 잡지 <문예>에 단편소설 ‘쑥 이야기’가 추천된 데 이어 19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파양’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쑥 이야기’는 “밥꼴을 못 보고 아침저녁을 거의 쑥죽으로만 살”아야 했던 가난한 농촌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작가 자신은 이 작품을 가리켜 “가난을 순한 어조로 묘사한 단편”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표현했다.

최일남은 1959년 <민국일보> 문화부장이 되면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1961년에는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거쳐 1963년 <동아일보>로 적을 옮겨 문화부장과 신동아부장, 조사부장, 부국장 등을 역임했지만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탄압 때 해직된다. 해직된 뒤에도 <신동아>에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연재하며 인터뷰집 <그 말 정말입니까>를 펴내기도 한 그는 1984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복직했다. 1980년대 중반 그의 시사 칼럼은 김중배 칼럼과 함께 독자들의 분노를 대변하고 희망의 길을 일러주었다. 그는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 논설위원으로 합류해서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창간 초기 <한겨레신문> 1면에는 ‘한겨레 논단’이라는 기명칼럼이 실려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는데, 최일남과 리영희, 변형윤, 조영래 등이 번갈아 가며 글을 썼다. 나중에는 강만길, 박완서, 백낙청, 한승헌 등이 필자로 합류했다.

언론인으로 일하면서도 소설을 꾸준히 발표한 그는 1975년 소설집 <서울 사람들>을 펴낸 것을 필두로 소설집 <춘자의 사계> <홰치는 소리> <누님의 겨울> 등과 장편 <거룩한 응달> <흔들리는 배> <하얀 손> 등의 장편을 내놓는다. 최일남의 1960~70년대 소설들은 소시민들의 속물성을 풍자적·해학적으로 묘사하는 데에서 특장점을 보였다. 1975년작인 단편 ‘서울 사람들’은 농촌 태생으로 어느덧 서울 사람이 된 30대 후반 남자들이 옛 시골 정취를 맛보겠노라며 강원도의 어느 시골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이들은 고생 끝에 이장 집에서 하루를 묵으며 고향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데, 이튿날이 되자 서울의 찬 맥주와 커피, 텔레비전을 그리워하며 일정을 앞당겨 서울로 돌아온다. 1986년에 이상문학상을 받은 ‘흐르는 북’은 젊은 시절 북에 미쳐 떠돌았던 민 노인과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잡혀 가는 대학생 손자 성규를 통해 1980년대의 엄혹한 현실과 세대간 화해를 다룬 역작이다.

최일남의 붓끝은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는 장편 <덧없어라 그 들녘>과 소설집 <만년필과 파피루스> <아주 느린 시간> <석류>에 이어 80대 중반 나이이던 2017년에도 소설집 <국화 밑에서>를 내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노년기의 최일남 소설들은 비슷한 연배였던 박완서의 그 무렵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노년 주인공들의 일상과 사유를 핍진하게 담았다. 그럼에도 그 자신은 노인과 ‘노년 문학’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자 했다. <국화 밑에서>에 실린 단편 ‘밤에 줍는 이야기꽃’에 나오는 이런 대목은 언론인이자 작가로서 최일남의 비판 정신이 남을 향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게도 마찬가지로 날카롭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년에 들면 마음이 너그럽고 사리 분별에도 밝다고들 하던데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리어 갈팡질팡 줏대 없이 구는 수가 많다. 남을 신뢰하지 못하는 만큼 자신의 언행에 미리 핑계를 대고 알리바이성 변명을 준비하기 일쑤다.”

독자들을 웃고 울렸던 해학과 풍자 역시 여전했다. “네가 필자면 나도 저자인 세상” “노회는 소년의 클릭 한 방만 못하고, 경륜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치여 별무소용이다” 같은 구절들에서는 경험과 연륜에서 오는 지혜, 세태의 핵심을 짚는 날카로운 안목,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한 애정으로 비판의 대상을 감싸는 휴머니즘의 태도가 돋보였다. 이 책을 내고 <한겨레>와 만난 그는 “나이 먹을수록 상상력이 절감되고, 그보다는 경험 쪽에 자신이 생긴다”며 “체험의 무게랄까 두께, 넓이, 이런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최일남은 2008년 2월 진보 문인 단체인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맡아 2년 간 재임했는데, 그가 퇴임하던 2010년 2월 총회장의 풍경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한국작가회의에 ‘불법·폭력 시위’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제출해야 예정된 지원금을 줄 수 있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작가회의 회원들은 확인서를 제출할지를 놓고 토론을 벌이던 중이었다. 지원금 3400만원은 작가회의 기관지 발행과 외국 작가 초청 행사 등에 쓰일 예정이었는데, 단상에 선 최일남 이사장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한 1년 잡지 안 내고 외국 작가 초청 안 하면 되지 않아요?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저항이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문화정책에 대해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작가회의의 역할이에요. 좀 크게 봅시다.”

조직 수장이자 최고 원로에 해당하는 선배 문인의 한 마디에 회원들은 ‘옳습니다’ ‘맞아요’라는 외침으로 호응했고, 작가회의는 지원금 수령을 거부하고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초 그는 <한겨레> 새해 특별 기고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며 백범 김구의 문화론에서 배울 것을 촉구했다. 그 글의 많은 대목들은 그로부터 13년 뒤인 지금을 두고 쓴 것처럼 읽힌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수틀리면 색깔론을 펴 탈이다. (…) 좀처럼 정부 비판 기사를 찾기 힘든 메이저 언론에서 힘을 얻는가. 자신에 넘치는 만큼 반대편 사람을 무시하고 시삐 본다.”

독자적 문체를 지닌 작가이자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는 칼럼니스트로 두 사람 몫을 너끈해 해낸 고인은 월탄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한무숙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인촌상, 위암장지연상 등과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이며, 발인은 30일 오전 9시로 예정되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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