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경찰 인권보호 규칙, 결국 ‘훈령’으로 시행…법제처 때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당초 대외 구속력 있는 행안부령 추진

법제처 심사 1년 가까이 지연에 우회

경찰관 조사서 인권침해 주체 ‘군대’ 꼽아

경향신문

지난해 7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모습. /권도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주간경향] 경찰청이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을 조만간 시행한다. 규칙안을 내놓은 지 약 1년 만이다. 규칙은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지켜야 할 구체적인 인권보호 원칙을 담고 있다. 경찰이 최근 수년간 표방해온 ‘인권경찰’을 구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령하는 규칙은 경찰청 내부 훈령이다. 경찰청은 지난해 애초 규칙을 대외적 구속력이 있는 행정안전부령으로 제정하려 했다. 부령은 1년 가까이 법제처의 심사 단계에 머물렀다. 그러자 법제처 심사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훈령 형식으로 시행키로 한 것이다. 중앙행정기관이 법제처 심사 지연을 이유로 이처럼 같은 내용의 규정을 급을 낮춰 시행하는 건 이례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행안부령은 법제처 심사 의뢰 철회


지난 3월 6일 국가경찰위원회의 정기회의에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훈령안이 상정됐다. 경찰위원회는 그러나 ‘의결 보류’ 결정을 내렸다. “입법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 등 보다 면밀한 검토·숙고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는 경찰청이 앞서 동일한 명칭과 내용의 규칙을 행안부령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다. 경찰청은 지난해 2월 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을 마련했다며 입법예고했다. 경찰청은 당시 “수사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각종 인권보호 규칙을 총망라한 독자적 규정”이라고 밝혔다. 특히 부령 형식을 취해 대외적 구속력을 높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검찰이 지켜야 할 인권 규정을 담은 ‘인권보호수사규칙’이 법무부령인 점도 고려됐다. 경찰청은 입법예고를 거쳐 그해 4월 법제처에 심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법제처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경찰청이 훈령이라는 ‘우회로’를 고안한 것이다.

경찰위원회는 지난 3월 20일 정기회의에서 해당 규칙의 훈령안을 결국 의결했다. 인권보호를 위한 규칙을 현장에 신속하게 하달해 하루빨리 정착시켜야 한다는 경찰청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훈령안의 내용은 부령안과 대부분 동일하다. 경찰청 관계자는 “약간의 용어 등 지엽적인 부분만 수정됐고 전반적인 취지와 내용은 모두 같다”고 말했다.

법제처는 그간 심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이유를 두고 별다른 설명 없이 “심사 중”이라는 답변을 되풀이했다. 심사기간이 길어지자 경찰청 담당자는 지난해 10월 직접 법제처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는데도 심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경찰청은 훈령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경찰청은 법제처 단계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청은 이번 훈령 시행에 따라 기존 부령의 심사 의뢰를 철회할 계획이다. 경찰청이 법제처에 계류 중인 부령이 아닌 훈령으로 시행하는 것을 두고 법제처는 “별다른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

부령은 법제처의 심사를 반드시 거쳐야 하지만 훈령은 그럴 필요가 없다. 다만 훈령도 시민에게 내용을 알리는 절차인 ‘행정예고’를 밟아야 한다. 경찰청은 동일한 명칭과 내용의 부령을 이미 지난해 입법예고했던 만큼 행정예고는 생략했다고 밝혔다. 이 훈령은 윤희근 경찰청장의 최종 결재를 거쳐 조만간 시행될 예정이다. 경찰청은 규칙 시행에 맞춰 ‘인권수사 매뉴얼’도 현장에 배포할 계획이다.

뭐가 다른가


이번 규칙에는 수사 과정에서 인권보호를 위해 지켜야 할 일반적인 총칙이 담겼다. 성별, 종교, 인종,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등 22개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는 선언적인 조항도 있다. 또 수사 개시, 체포·구속, 압수수색, 피의자 및 피해자 조사 등 각종 수사단계에서 인권보호를 위해 준수해야 할 내용도 포함됐다.

경향신문

지난 1월 19일 건설 현장의 불법행위를 수사하는 경찰이 서울 금천구 가산동 한국노총 건설산업노조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후 압수한 물품을 옮기고 있다. /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전화로 출석을 요구할 때는 조사 일정과 사건명 등을 문자메시지로도 전송토록 했다. 정보저장 매체에서 별건 혐의를 발견하면 탐색을 중단함으로써 별건 수사를 예방하도록 했다. 자료를 임의제출 받을 땐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알리도록 한 점도 눈에 띈다. 소년, 장애인,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할 때 유의해야 할 내용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부령은 대외적 구속력이 있다. 경찰청이 본래 해당 규칙을 부령으로 추진하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찰의 수사가 시민의 권리·의무와 관련된 사안인 만큼 인권보호를 위한 규정도 법규명령으로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훈령은 행정규칙으로 기관 내부만을 규율한다. 다만 이번 규칙이 시행되는 데 있어 부령과 훈령의 차이가 크지는 않다고 경찰청은 밝혔다. 훈령을 어기더라도 ‘위법 행위’에 해당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가능하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국가배상책임에 있어서 공무원의 가해행위는 ‘법령에 위반한 것’이어야 한다. 대법원은 2007년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이 경찰청 훈령에 불과하지만 훈령의 목적이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내용도 인권보호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를 위반한 것은 위법 행위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훈령도 헌법소원의 대상이 된다. 법령의 형식보다는 실질적인 내용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찰청이 이번에 부령을 취소하고 훈령으로 규칙을 추진한 것은 이런 점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해양경찰청도 향후 경찰청과 같은 결정을 할 가능성이 있다. 해양경찰청은 지난해 9월 ‘해양경찰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을 입법예고하고 법제처에 심사를 의뢰했다. 이 역시 해양수산부령이다. 경찰청의 규칙과 내용도 유사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법제처의 심사가 진행 중인 상태다. 해양경찰청은 경찰청이 법제처의 심사 지연 때문에 기존 부령 대신 새로 훈령을 제정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해양경찰청 관계자는 “법제처의 심사가 아직 계속되는 이유는 우리도 알지 못한다”라며 “꼼꼼히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법제처 심사 의뢰를 철회하고 훈령으로 규칙을 시행하는 방안을 두고는 “아직 지켜보고 있다. 심사가 계속 늦어지면 그때 가서 훈령으로 제정하는 것을 고민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현장 경찰관의 인권의식 수준은?


한편 일선 경찰관의 인권의식을 엿볼 수 있는 조사결과가 있어 주목된다. 지난해 2월 발간한 ‘경찰청 인권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 보고서에는 경찰청 인권보호담당관실이 시행한 경찰관 인권의식 실태조사 결과가 실려 있다. 인권을 주제로 전국 18개 시·도 경찰청의 현장 경찰관 579명을 대상으로 했다. 참여자는 경정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순경~경감 계급이다.

국내 인권 상황을 두고 ‘존중된다’는 응답은 82.7%였다. ‘보통’은 15.7%, ‘존중 안 된다’는 1.6%로 집계됐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22년 인권의식 실태조사’에서 국민 74.7%가 인권이 존중되고 있다고 응답한 것보다 긍정적인 답변이 높았다.

경향신문

지난 3월 23일 서울시청 인근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관계자들이 ‘420 장애인 차별 철폐 공동투쟁단’ 출범식을 진행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권과 경찰활동과의 관계’를 두고 ‘있다’고 응답한 경찰관은 85.8%였다. 반면 ‘인권 문제에 대한 경찰의 책임’을 묻는 말에 ‘있다’고 답한 비율은 73.0%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또 ‘경찰은 인권옹호자가 돼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지 물었더니 65.9%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본인은 인권옹호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는 63.0%만 ‘그렇다’고 답했다. 보고서는 “경찰관이 인권보호자라는 명제에 대한 인식 부족, 인권보호 책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부담 등이 반영된 결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시민 불편 해소를 위한 집회·시위의 자유 제한’을 두고 찬성은 82.7%인데 반해 반대는 5.0%에 그쳤다. 랑희 경찰개혁네트워크 활동가는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제도와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보여준다”라며 “이는 기본권을 침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실제 경찰이 그런 모습을 보여왔다”고 지적했다. ‘교육 또는 양육상 아동·청소년에 가하는 체벌’에 대해선 31.6%가 찬성 반응을 보였다. 30.7%가 중간, 37.7%가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체벌은 불법이다.

‘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경찰 목적 달성에 장애가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35.7%가 찬성, 중간 28.4%로 집계됐다. 반대는 35.7%였다. ‘피의자의 인권보장’은 64.2%가 찬성했고, 중간 24.6%, 반대 11.3% 등으로 나타났다.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피의자의 인권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항목에 51.6%가 ‘찬성’이라고 응답했다. ‘중간’과 ‘반대’는 각각 24.2%였다.

경찰관들은 ‘인권침해 주체’로 군대(26.2%)를 가장 많이 꼽았다. 복지수용시설(16.7%), 구금시설(13.6%), 언론기관(11.6%)이 뒤를 이었다. 검찰은 9.5%였고, 경찰 스스로를 지목한 응답은 4.7%에 그쳤다. 인권위의 최근 몇 년간 인권의식 실태조사에서 경찰·검찰의 조사와 수사가 34.8~43.1%로 가장 많이 거론된 것과 대비된다.

반면 ‘경찰은 국민 인권보호 위한 인권보장에 노력하고 있다’(88.8%), ‘경찰의 정책은 국민의 인권을 잘 보장한다’(88.0%) 등 인권보장을 위한 경찰의 노력과 시행에는 후한 평가를 줬다.

랑희 활동가는 “경찰이 인권 침해를 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설문조사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라고 꼬집으며 “인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항목별로 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연결되는 여러 조사 항목을 모은 심층조사가 필요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 삼성 27.7% LG 24.9%… 당신의 회사 성별 격차는?
▶ 뉴스 남들보다 깊게 보려면? 점선면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