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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박정희도 북한과 대화했다…윤 대통령은 뭘 위해 강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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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474

철학 없는 대통령과 안보 위기

과거 암살 시도에도 교류했는데

윤 대통령, ‘친일·종북’ 갈라치기만

한반도 정세 관련 철학·전략 부재

극우 분단 기득권 세력에 올라타


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8월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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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당선자 신분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이 정진석 특사단장 등 일본에 파견했던 특사단 일행과 저녁 모임을 하면서 소주 ‘처음처럼’ 글씨가 ‘신영복 서체’라는 이유로 “나는 그런 거 안 마신다”고 했다는 일화를 올해 3월 칼럼(<중앙일보> ‘김현기의 시시각각’)에서 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설마 정말로 그랬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윤 대통령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최근에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국무회의가 끝난 뒤 이도운 대변인이 윤 대통령의 발언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통일부는 앞으로 북한 퍼주기는 중단하고, 북한이 핵 개발을 추진하는 상황에서는 단돈 1원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라.”

“북한의 인권, 정치, 경제, 사회적 실상 등을 다양한 루트로 조사해서 국내외에 알리는 것이 안보와 통일의 핵심적 로드맵이다.”

“지난주 대전 현충원에서 열린 서해 수호의 날 행사에서 유가족들이 ‘일본에게는 사과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자식을 죽인 북한에 대해서는 사과하라는 얘기를 왜 안 하느냐’고 하소연을 했는데, 이런 시각이 보편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기가 막혔습니다. 잘 믿기지 않아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감정만 있고 품격·금도·위력 없는


윤 대통령은 이른바 보수정당의 대통령입니다. 북한 핵 폐기와 북한 인권 개선에 강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선 공약집에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실현’, ‘북한 인권재단 조속히 설립’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발언은 너무나 이상합니다.

우선 북한 인권을 안보와 통일의 로드맵으로 연결하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북한 인권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국민의 안보 의식을 강화하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는 얘기 같긴 한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북한 퍼주기 중단’도 말이 안 됩니다. 통일부가 북한에 뭘 퍼주었나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아니 문재인 대통령 때인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 관계는 사실상 끊어져 있습니다.

‘단돈 1원도 줄 수 없다’는 감정적 표현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을 거지 취급하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당황한 통일부가 그날 오후 “인도적 지원은 일관되게 추진한다는 기존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진화에 나섰습니다.

윤 대통령의 강경 발언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핵물질 생산 확대 지시 등 북한의 최근 무력시위를 향한 대응으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대외 발언에는 품격과 금도가 필요합니다. 사나운 말을 많이 쏟아내는 것보다 묵직한 한마디가 더 위력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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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지도하며 “무기급 핵물질 생산 확대”와 “핵무기 생산 박차”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28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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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일본에게는 사과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자식을 죽인 북한에 대해서는 사과하라는 얘기를 왜 안 하느냐’는 천안함 유가족들의 하소연이 보편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일종의 폭언입니다.

천안함 유가족은 할 수 있어도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닙니다. ‘한-일 관계 개선에 반대하면 빨갱이’라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을 ‘친일’과 ‘종북’으로 편 가르기 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은 열흘 전인 3월21일 국무회의에서도 “전임 정부는 수렁에 빠진 한-일 관계를 그대로 방치했다”며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을 일종의 색깔론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한-미 훈련 복원…북 반발엔 대책 없어


윤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전에도 몇 차례 드러난 적이 있습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2021년 12월29일 경북도당 선대위 출범식에서 “좌익 혁명 이념 그리고 북한 주사 이론, 이런 거 배워서 민주화 운동 대열에 낑겨서 마치 민주화 투사인 것처럼 지금까지 끼리끼리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온 집단들이 이번 문재인 정권 들어서서 국가와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해 10월19일 국민의힘 원외 당협위원장들과 만나서는 “종북 주사파는 진보도 좌파도 아니며, 적대적 반국가 세력과는 협치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고는 과거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분단 기득권 세력의 논리와 똑같습니다. 극우 이념 집단인 태극기 부대의 주장을 빼다박은 것입니다.

윤 대통령이 이러한 극우 이념을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체제 수호 집단인 검찰에 오래 근무하면서 형성된 것일까요, 아니면 보수정당인 국민의힘 입당 이후에 생긴 것일까요? 어느 쪽이든 대한민국 대통령이 극우 성향의 이념에 지나치게 매몰돼 있다는 것은 우리 국민에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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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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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은 정치를 시작한 이후 처음에는 남북 관계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021년 6월29일 대선 출마 선언에서는 아예 남북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11월3일 국민의힘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는 “국제사회와의 철저한 공조를 통해 비핵화를 더 효율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2022년 3월10일 당선 직후 연설에서는 “북한의 불법적이고 불합리한 행동에 대해서는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하되, 남북대화의 문은 언제든 열어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5월10일 취임사에서는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북한 경제와 북한 주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계획을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의 광물·희토류 등 지하자원과 식량·생필품 공급을 연계하는 식량 공급 지원 △발전·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 현대화 프로젝트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병원, 의료 인프라 현대화 지원 △국제투자와 금융 지원 등 6개 제안을 내놨습니다.

이런 제안은 사실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는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항만과 공항 현대화는 강조하면서 남북 연결 철도 운행 재개는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대선 때 “문재인 정부 시절에 대폭 축소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복원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군사훈련을 강화하면 북한의 반발은 예상된 수순입니다. 그런데 대책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한국과 미국은 군사훈련을 복원했고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핵무기 위협으로 반발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더 강경한 자세로 맞서고 있습니다. 강 대 강 악순환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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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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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 프레임 선택, 일본 관계 개선 몰입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와 주변 정세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철학과 전략 부재가 크게 한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한반도 분단 체제에 기생해서 금전적 이득을 보려는 군산복합체, 극우 세력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반도를 한·미·일 해양세력과 북·중·러 대륙세력의 대결 마당으로 설정하고, ‘해양세력이 대륙세력을 이겨야 한다’고 선동합니다.

윤 대통령의 잘못은 이들 분단 기득권 세력의 대결 프레임에 너무 쉽게 올라탄 것입니다. 올해 들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급하게 서두르는 것도 그런 흐름의 일환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가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잃고 주변국에 의해 휘둘리게 됩니다. 큰일입니다.

윤 대통령의 선택은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한반도 정세 인식이나 행동과도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북한은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31명의 특공대원을 내려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했습니다.

1983년 북한의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가 있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1984년 북한의 수해 복구 지원 제안을 받아들여 남북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남북 간에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체육회담이 이뤄졌습니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호 방문이 이뤄졌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밀사가 오고 가기도 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외교,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유엔 동시 가입,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등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김일성 주석과 남북 정상회담에 합의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됐지만, 만약 이때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한반도 평화가 앞당겨지고 북한은 핵 개발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때 남북 관계는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 북한 계좌 동결,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가동 중단 등 여러 악재 때문이었습니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남북 관계는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시절보다 더 나빠져 가는 것 같습니다. 걱정입니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3월29일 갑자기 경질됐습니다. 교체 배경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외교·안보 핵심 참모 교체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혹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정말 걱정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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