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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4년 만에 핀 매화, 내 식대로 봄을 누리기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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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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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에는 매화 아래 쪼그리고 앉아 냉이와 민들레를 캐서 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쳤다. 오늘 아침에는 꽃이 가득한 매화나무 옆에서 커피를 마셨다. 우리 집 마당에서만 매화가 피어난 것도 아닌데 나는 매화가 피었다고, 우리 집 마당에 봄이 왔다고 호들갑스럽다.

매화나무를 심은 것은 4년 전 봄, 꼬챙이 같은 나무 열 그루를 사다 심으면서 대체 이게 언제 자라 매실을 따려나 싶었다. 그즈음 책방에 들른 사람이 말했다. 저걸 키워서 매실을 따려면 한세월 걸려요. 저도 심었다 다 잘라 버렸어요. 그러나 나는 꿈꾸었다. 열 그루의 나무가 모두 꽃이 피면 그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냉이 같은 봄나물을 캐야지. 생각하면 등이 따끈해졌다.

일 년쯤 지나면서 어떤 것은 죽어서 잘리고, 어떤 것은 발에 자꾸 걸려서 잘려나가 다섯 그루가 되었다. 열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기에는 땅이 너무 좁았다. 그새 꼬챙이 같던 나무는 조금씩 굵어졌다.

나무는 좀처럼 꽃을 피우지 않았다. 언제나 이것들은 꽃을 피우려나. 꽃을 피우지 않으니 매실도 열리지 않았고, 잎도 풍성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잎마름병으로 잎이 다 말라 버리기도 했다. 좁은 밭 한쪽에 뚝뚝 서 있는 나무들을 볼 때마다 이것을 잘라야 할까 어쩔까 싶었다.

올봄, 나무에 꽃눈이 가득해 깜짝 놀랐다. 설마 이것들이 다 꽃을 피울까, 그렇다면 얼마나 나무가 환해질까. 아직 추운 봄, 나는 매일 가까이 가서 혹은 슬쩍 지나치듯 곁눈질을 하면서 매화나무의 꽃눈이 완연하게 피어나길 바랐다. 이윽고 많은 꽃망울 중 한두 송이가 터졌고, 며칠 새 활짝 꽃을 피웠다. 나무는 가지마다 우윳빛 매화를 촘촘하게 품었다. 보란 듯 꽃 사이로 벌도 드나들었다. 마당에서는 은근한 향내도 났다. 나는 매화나무 주변을 맴돌다 꽃망울 몇 개를 땄다.

유리잔에 매화봉오리를 몇 개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꽃이 활짝 피어나기도 했고, 어떤 것은 그대로 입을 꼭 다문 채로 멈췄다. 유리잔이 연한 노란빛으로 변했다. 맛이 심심했다. 오래전 지리산에 갔다 친구가 매화차를 내놓고 향을 말할 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매일 여러 잔의 커피를 마시고 자극적인 맛에 둘러싸여 바쁘게 살 때였다. 나는 점잖은 척 맹물 같은 차를 마시다 결국에는 커피를 부탁했었다.

매화차를 입 안에 가득 머금고 천천히 마셨다. 지리산 친구처럼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 맛을 조금 느껴봐야겠다 맘먹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심심하기만 했던 매화차에서 단맛이 났다.

시골로 들어와 단출한 삶을 지향하면서 산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욕망이 가득하다. 천천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달려 나간다. 시골에 산다고 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 집 매화나무는 왜 이렇게 꽃을 안 피우나 조바심 내면서 꽃핀 매화나무를 부러워한다.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봄날, 움츠렸던 마음을 편다.

달래를 캐서 달래장을 만들고, 쌉쌀한 머위를 뜯어서 슬쩍 데쳐 쌈을 싸 먹고, 참나물을 뜯어 조물조물 무쳐 먹고. 그렇게 봄을 먹는 동안 내 안으로 들어온 봄이 나를 깨울 것이다. 봄이 왔다! 이 봄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우리 집 마당에 온 봄을 나대로 누리는 것이다. 봄 햇살 아래 쪼그리고 앉아 흙과 바람이 전하는 은밀한 속삭임을 들어가며. 그새 손은 벌써 거칠어졌다.
한국일보

임후남 시인·생각을담는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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