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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4장짜리 가짜 인생 달달 외워”… 美명문대 금발 남자, 러시아 스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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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러시아 스파이 세르게이 체르카소프. 그는 브라질 출신인 척 행세하며 미국 명문대 대학원을 다니고, 국제형사재판소(ICC) 인턴 자격까지 취득했던 것으로 조사됐다./미 법무부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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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출신인 척 행세하며 미국 명문대 대학원을 다니고, 국제형사재판소(ICC) 인턴 자격까지 취득했던 남성이 사실은 러시아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29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러시아 스파이 세르게이 체르카소프는 2010년부터 가짜 신분으로 살아왔다. 그는 10년 넘게 ‘아일랜드계 브라질 남성’인 빅토르 뮬러 페레이라로 위장했다.

브라질 법원 문서에 따르면, 페레이라의 출생증명서는 체르카소프가 브라질에 입국하기 1년 전인 2009년 발급됐다. 또 다른 사람의 사진이 들어간 운전면허증과 서류 등이 발급된 것으로 조사됐는데, 이는 러시아군 정보기관 총정찰국(GRU) 측이 사전 준비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WP는 설명했다.

GRU는 체르카소프의 신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를 1993년에 사망한 브라질 여성 주라시 엘리자 페레이라의 아들로 설정했다. 그러나 법원기록, 유족 등에 따르면 실제로 주라시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고 한다.

또 체르카소프는 포르투갈어로 작성된 4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페레이라’로서의 삶을 외웠던 것으로 파악됐다. 해당 문서에는 “리우데자네이루의 다리에서 나는 생선 냄새를 혐오한다” “과거 일했던 정비소에는 배우 파멜라 앤더슨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동료들은 내 금발머리의 외모와 이상한 억양을 두고 종종 농담을 했다. 그들은 나를 외국인이라고 불렀다. 친구가 별로 없었다” 등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체르카소프는 브라질 입국 후 몇 년 동안 한 여행사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해당 여행사가 GRU 요원이 운영했던 것으로 의심되며, 현재는 문을 닫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땄고, 2018년 미국 명문대인 존스홉킨스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 체르카소프의 실제 나이는 33세였으나, 다른 학생들과 교수들에게는 20대 후반인 척 행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체르카소프는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급우들과 함께 이스라엘 현장 견학을 갔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때 그는 미국과 이스라엘 관리들, 학생들이 만난 다른 이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2020년 1월 필리핀 여행 중 비밀리에 러시아 요원과 접촉해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공유했다.

체르카소프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크게 의심을 사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존스홉킨스대 교수이자 러시아 원어민인 유진 핀켈은 “그의 억양이나 행동을 보고 그가 러시아인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을 아일랜드 뿌리를 가진 브라질인이라고 표현했고, 이것이 그의 이상한 억양을 설명해줬다”고 했다.

체르카소프는 졸업을 앞두고 유엔, 미국 싱크탱크, 금융기관, 언론 매체, 정부기관 등을 목표로 인턴십을 지원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용이 침체되자, 그는 학생비자 만료를 몇 달 앞둔 2020년 9월 브라질로 떠났다. 체르카소프는 브라질에서도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워싱턴의 고위 관리들이 모스크바의 움직임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등을 러시아 측에 보고했다.

체르카소프는 지난해 3월 ICC 인턴십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보안 검사를 통과해 견습 분석가 자격을 얻었다. WP는 “오랫동안 모스크바(러시아 당국)에서는 ICC를 적대적인 기관으로 인식했다”며 “지난달 ICC는 우크라이나 전쟁범죄 혐의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설명했다.

체르카소프는 같은 달 31일 상파울루 인근 정글 하이킹 트레일에 컴퓨터 드라이브 등을 숨겨놓은 뒤, ICC가 있는 네덜란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네덜란드 정보국은 FBI로부터 정보를 넘겨받아 체르카소프가 러시아 스파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당국은 공항에서 체르카소프를 체포해 몇 시간 동안 심문했다. 그 다음 체르카소프를 다시 비행기에 태워 브라질로 송환했다. 그는 브라질에 도착하자마자 구금됐다. 체르카소프는 자신이 러시아 스파이가 아니라며, 페레이라 신분이 진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문서 위조 등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러시아 당국은 체르카소프가 스파이라는 사실은 부인하면서도, 그가 러시아를 탈출한 헤로인 밀매업자이며 현재 수배된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체르카소프의 주장도 바뀌었다. 러시아 당국은 브라질에 체르카소프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고, 체르카소프도 이에 동의했다. WP는 “잔인함으로 악명 높은 러시아 감옥에서 더 긴 형을 살아야 하는데도 그는 러시아 당국의 주장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브라질 대법원은 최근 러시아의 범죄인 인도 요청을 잠정 승인했다. 다만, 브라질 고등법원은 스파이 혐의와 관련한 조사가 끝나기 전에는 체르카소프를 송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체르카소프는 미국에서도 불법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 비자 사기 혐의 등으로 기소된 상태다. 다만 미국은 아직까지 체르카소프의 인도를 요청하지는 않았다.

[김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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