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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일사일언] 꽃과의 ‘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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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베란다 정원 만드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다. 틈만 나면 동네 꽃집에 가서 모종을 사 오곤 했다. 화분에서 꽃이 피었는지 확인하는 일이 유일한 기쁨인 시절이었다.

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꽃이 지자마자, 식물은 1년 동안 이발을 안 한 사람처럼 볼품없어졌다. 베란다 습도를 제대로 조절 못 해서인지 잎사귀 끝이 볕에 타들어 갔다. 줄기도 썩어서 누렇게 변했다. 살리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죽는 식물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듬해, 나는 모종을 사지 않았다. 가을, 겨울을 지나면서, 꽃을 볼 수 있는 때는 무척 짧다는 걸 알게 되었다. 베란다는 나가기 싫은 공간이 되었다. 흙탕물 자국과 시든 잎이 바닥을 어지럽혀서, 아무리 청소해도 단 며칠 만에 더러워졌다. 그 당시 내가 산 식물 중 살아남은 건 제라늄 세 개뿐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제라늄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사이 나는 집을 두 번 옮겼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계속 잎을 틔우려는 의지가 기특해서, 때때로 물을 주고, 환기도 시켜줬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름은 당연히 주지 않았고, 분갈이도 하지 않았다.

재작년 선물받은 서양란도 두 번째 꽃대를 올렸다. 시든 꽃대를 잘라주고, 잊을 때쯤 물을 주었다. 정말이지 최소한의 관리만 해주었다. 이쯤 되니, 가끔 식물과 ‘밀당’하는 기분이 든다. 화분을 노려보면서 관심을 적게 줄수록 더 잘 자라는 걸까, 의심이 생겼다. 물론 식물이 사람의 마음을 알 리 없다. 식물 입장에서는 그저 생육 환경이 편해진 것뿐일 터이다.

나는 식물을 좋아하지만, 키우는 데는 서툰 사람이었다. 꽃집 사장님의 조언이나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를 곧이곧대로 따랐다. 집마다 생육 환경이 다른데, 정량화된 방법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간과했던 사실은 식물의 생명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실은 내가 식물을 키울 때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지영 202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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