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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에릭 존의 窓] 한국의 역동성이 소용돌이치는… 종로구라는 ‘소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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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 도시는 어디나 변화를 거듭하며 역동성을 띠게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껏 서울보다 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도시는 본 적이 없는 듯하다. 한국의 다른 도시도 그렇겠지만 서울은 매년, 어쩌면 매달, 점점 더 흥미롭고 매력적인 글로벌 허브로 진화해 가고 있다. 처음 한국에 온 1980년대부터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종로구에 거주하며 시대상의 변천을 직접 목도했다. 그러니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나아가 거대한 변화의 물줄기를 한눈에 보여주는 ‘소우주’와도 같은 곳이다.

한국에 처음 도착해 살게 된 곳은 당시 ‘컴파운드 투(Compound II)’라 불리던 미국대사관 숙소였다. 1984년 2월의 어느 추운 밤, 이곳에 도착해 한 블록 전체를 가로지르는 4m 높이의 돌담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경내를 돌아보니 일제 시대의 유산인 일본식 가옥이 대사관이 새로 지은 타운하우스와 미국식 아파트를 에워싼 구조였다.

작은 식료품점, 당시 매우 인기 있던 실내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그리고 처음으로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았던 작은 영화관도 있었다. (이 테니스 코트에서 외교관으로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으니, 바로 언제나 대사가 항상 이기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많은 인생 교훈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배운 최고의 교훈이었다.) 1997년, 미국은 이 송현동 부지를 한국 대기업에 매각했다. 미술관을 건립하려 했으나 청와대 및 궁궐에 근접한 위치 때문에 끝내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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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파운드 투 북쪽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다. 삼청동과 가회동은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내게 서울의 여느 지역과 다름없는 동네같이 보였고, 낡은 한옥과 조그마한 상점에는 딱히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사동, 명동 등 다른 활기찬 동네들에 훨씬 더 매료되었다. 횡단보도가 없어 대사관으로 걸어갈 때는 매일 육교를 이용해야 했다. 당시 서울 도심은 보행자 친화적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 후,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중국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미술관, 식당, 커피숍 및 베이커리를 찾아 너도나도 몰려드는 가회동으로 이사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짧은 주말 동안 3대에 걸친 한국인의 감성을 경험하고 싶다면, 먼저 삼청동에서 모닝커피 한 잔을 들고 거리를 거닐어 볼 것을 추천한다. 20~30대 청년들이 화기애애하게 산책하며 현대 미술관과 옷집을 드나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 주요 명소 중 하나는 단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옛 국군기무사령부 부지에 자리하고 있다. 기무사 옛 심장부에 위치한 이곳에서 최근 1970~80년대 시위 예술을 다룬 전시를 관람하면서, 한국보다 더 아이러니한 국가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나와 경복궁 쪽으로 걸어가면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이 완벽하게 복원된 경내에서 역사를 탐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두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극적으로 다른 모습들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총독부가 건설한 청사 건물(당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이 도심 한복판에 아픈 역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궁궐 뒷문으로 나가면 청와대 관람을 위해 관광버스를 내리는 어르신의 행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일평생에 걸쳐 독재 정권부터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된 바로 그 현장을 직접 방문하려는 것이다.

거의 매주, 이 같은 코스로 종로구를 산책하며 그간의 세월과 앞으로의 나날에 대한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컴파운드 투’의 옛 모습을 떠올린다. 이제 거대한 장벽과 낡은 콘크리트 건물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공원이 조성되었다. 송현 광장에 서서 2021년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을 바라보거나, 산책하는 인파에 합류해 공원을 거닐거나, 외부 곳곳에 전시된 미술 작품과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해도 좋다. 이제 1년 남짓 후면 굴곡진 송현동 부지의 역사가 돌고 돌아 회귀할 것이다. 갖은 규제를 들어 미술관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던 바로 그 부지에,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품을 전시할 기증관을 유치한다고 한다. 개관일 아침, 나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서 줄을 설 생각이다.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태국 미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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