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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벙커 부장, 벙키 판사 [만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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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만 해도 법원 출입기자들은 법원장 부속실에서 판결문 초고(草稿)를 봤다. 배석판사가 쓴 초고가 온전하게 남은 게 거의 없었다. 부장판사가 손을 대 고치기 때문인데 새로 쓰다시피 한 경우가 적잖았다. 대부분 연필로 고치지만 빨간 펜을 쓰는 부장판사도 있었다. 그러면 판결문이 벌겋게 변한다. 이렇게 깐깐한 ‘빨간 펜 선생님’ 부장판사를 배석판사들은 ‘벙커(bunker)’라고 불렀다. 탈출이 어려운 골프장 모래 구덩이에 빗댄 것이다.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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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법원은 부장판사가 갓 임용된 배석판사 둘과 재판부를 구성해 이들을 도제식으로 길러낸다. 최근 법관 임용 방식이 다양화됐지만 이 시스템은 아직도 사법부를 유지하는 큰 틀이다. 후배들 잘 가르치는 ‘좋은 벙커’가 아직 필요한 이유다. 실제 유명 법관 중에 벙커로 불린 이들이 많았다.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 이용훈 전 대법원장, 권성 전 헌법재판관 등이다. 전직 고위 법관은 회식 자리에서 “내가 원조 벙커다. 실력 있으면 탈출 가능하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게 과해서 법원 분위기를 경직시킨 측면도 있다. 과거엔 합의부 판사 셋이 밥 먹으러 갈 때 부장판사가 가운데 서고 배석판사 둘이 좌우에서 걸어다녔다. 속칭 ‘삼각 편대비행’이다. 일과 무관하게 후배들을 괴롭히는 ‘나쁜 벙커’도 있었다. 식사는 물론 취미생활까지 같이할 것을 은근히 강요하는 ‘갑질 벙커’였다.

▶이젠 벙커도 옛말이다. 실연당했다고, 이혼했다고 몇 달간 판결 선고 못 하겠다는 배석판사들이 나타나고 있다. 몇 년 전 1심 배석판사들이 ‘주 3회 선고’에 암묵적으로 합의했고 이게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다는 말이 무성하다. 이런 판사들 때문에 ‘벙키’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벙커와 신인을 뜻하는 루키(rookie)의 합성어로, 일을 맡겨도 제대로 하지 않는 젊은 판사를 뜻한다.

▶이런 변화의 배경엔 워라밸을 중시하는 젊은 판사들의 문화도 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법원장 후보 추천제 도입 등으로 판사들이 열심히 일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 탓도 크다고 한다. 문제는 이게 재판 지연으로 연결돼 국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최근 5년간 법원에서 2년 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민사 소송은 3배로, 형사소송은 2배로 늘었다. 그런데도 김명수 사법부는 이를 방관해왔다. 그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

[최원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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