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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무릎 꿇은 유골 40여구에 감긴 ‘삐삐선’···72년 만에 드러난 ‘이념갈등’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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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성재산 방공호에서 드러난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희생자 유골. 진실화해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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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퍼내자 폭 3m, 길이 14m 크기의 방공호가 드러났다. 방공호를 빽빽이 메운 것은 유골이었다. 유해 대부분은 다리가 접힌 채였고, 군용전화선인 ‘삐삐선’이 팔뼈 부분을 칭칭 감고 있었다. 일부 두개골에는 파랗게 녹슨 탄피가 얹혀 있었다. 이렇게 충남 아산시 배방읍 공수리 성재산 땅 밑에서 발견된 유해는 40여구였다. 유해 근처에서는 A1 소총 탄피와 탄두,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사용한 99식 소총 탄피 등도 발견됐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8일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유해발굴 현장을 공개하며 “지난 7일 시작한 발굴 작업 현장에서 4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유골 대부분은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건장한 남성의 것이었다. 이번 발굴은 이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첫 발굴이다. 아산시가 2018년부터 2년간 시내 일대에서 215구의 희생자 유골을 발굴한 데 이어 국가가 추가로 발굴한 것이다.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은 1950년 9월에서 이듬해 1월 사이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민간인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향토방위대, 태극동맹)가 “인민군 점령기 시절 북을 위해 일했다”는 명목으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해 시신을 유기한 사건이다. 가해자들은 ‘부역자’로 낙인찍은 이들과 그 가족을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했다.

아기조차 울음 ‘뚝’···이념 갈등이 앗아간 마을 주민들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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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성재산 방공호에 무릎이 굽혀진 채 매장된 유해. 진실화해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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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선이 감겨있는 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들. 진실화해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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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간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을 만큼 몽둥이에 맞은 다음 구덩이에 던져져 흙으로 덮어졌죠.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꿈틀거린 채 생매장됐습니다. 작은어머니는 ‘끔찍한 상황에서 살려고 하니 밭으로 숨은 여자아이 등에 업힌 젖먹이조차도 울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아산시 염치면 대동리 마을 주민이었던 이모씨는 1950년 9월27일 대동리 인민위원장을 지낸 홍사학과 그 가족의 죽음을 목격했다. 이씨가 1기 진실화해위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홍씨 가족은 마을의 한 가옥에 감금됐다가 2~3일에 걸쳐 마을 공동묘지에서 살해됐다. 이씨는 “당시 주민들 중 누군가가 나서서 ‘누구 잡아라’ 하면 삽시간에 지목당한 사람을 잡아 죽이는 분위기였다”고 증언했다.

학살은 한국군과 유엔군의 9·28 서울수복과 북한군의 1·4 후퇴 시기 가장 심했다. 1950년 9월29일 미군은 아산 온양읍에 입성했고, 며칠 후 온양경찰도 활동을 복귀했다. 이를 계기로 아산 동북부 지역에서 조직돼 활동하던 치안대는 아산 전역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치안대와 경찰은 인민군 인민위원회 내무서에서 일했거나 인민군의 단순 심부름을 한 사람을 모두 체포했다.

부역자 혐의를 받은 주민들은 창고, 학교 등으로 연행됐다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다. 배방면 주민 전모씨는 “9·28 수복 후 좌익 관계 주민들에게는 군민증을 발급해주지 않아 1·4 후퇴 시기 배방면 세교리 주민의 70~80%가 피난을 못 갔다”며 “1951년 1월 초 소련제 장총을 가지고 다니던 치안대원들이 군민증을 내준다며 주민 60~70명을 이장 집으로 불러들였고, 그날 밤 그들은 (경찰) 지서 옆 창고에 감금됐다가 다음 날 성재산 방공호로 끌려가 총살당했다”고 증언했다. 전씨는 “부역 혐의에 대한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도 끌고 가 죽였다”고 말했다.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 마을에는 총소리와 비명, 치안대의 구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성재산에서 5리(약 1.9km) 떨어진 곳에 살았다던 성모씨는 “수복 시기 매일 밤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치안대 청년방위대원이었던 김모씨도 “탕정지서 정문에서 친구와 경비를 서는 동안 지서 안에서 사람을 구타하는 소리와 비명을 들었다”며 “1950년 10월10일 자정쯤 여러 발의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희생자 중에는 다수의 여성과 어린이들도 있었다. 아산경찰서의 신원조사기록과 유족의 증언 등을 종합해 1기 진실화해위가 확인한 희생자 77명 중 0~10세는 14명, 11~20세는 6명이었다. 여성은 28명이었다. 2018년 아산시가 발굴한 매장지에서는 당시 여성들이 쓰던 은비녀, 플라스틱 비녀, 옥 비녀 등이 발견됐다.

1기 진실화해위는 “희생자 성별·나이 등을 고려하면 부역자 살해가 뚜렷한 혐의나 기준 없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됐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 “공권력 불법 행사 내버려 둔 이승만 정부에도 책임”


1기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의 가해 주체를 온양경찰서와 치안대로 규정한 바 있다. 1기 진실화해위는 2009년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하면서 “경찰을 지휘한 온양경찰서장과 충남경찰국에도 가해 책임이 있다. 공권력의 불법 행사를 막지 못했던 이승만 정부에까지 그 책임이 귀속된다”고 밝혔다.

이어 “무장한 경찰과 치안대가 단지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혐의, 또는 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적법한 절차도 없이 살해한 행위는 명백한 위법”이라며 “(국가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했다.

다수의 희생자 시신은 70여년이 지난 아직도 발굴되지 않았다. 2기 진실화해위는 “당시 희생자들은 가족 단위로 살해돼 유족이 없는 경우가 많아 유해 수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가해자와 피해자 자손들이 공동체 내에 어울려 사는 경우가 많아 유해발굴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경찰이 시신을 유기한 장소를 외부에 알리지 않은 점도 발굴이 어려운 이유다.

2기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부역 혐의 사건에 대한 유해 발굴은 그동안 지자체 또는 시민단체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라며 “2기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7월 ‘유해 매장 추정지 실태조사 및 유해 발굴 중장기 로드맵 수립 최종보고서’를 발간해 이를 근거로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2기 진실화해위는 4월 중순까지 현 발굴지점에 더해 염치읍 백암리 두 곳에서 수습 작업을 할 예정이다. 진실화해위는 최소 800구의 희생자 시신이 아산시 일대에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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