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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새로운 유형의 위기’ 전조? 2008년과 다른 은행발 금융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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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투자 아닌 유동성관리 실패

단기자금시장 경색 대신 개별은행 뱅크런으로

시장 여건 개선됐지만, 위기 확산 우려는 여전


한겨레

지난 13일(현지시각)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의 실리콘밸리은행 지점 앞에 예금을 찾으려는 고객들이 줄 서 있다. 웰즐리/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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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0∼40년 내에 이렇게 금리를 급박하게 올린 적이 없습니다. 금융시장이 긴장한 상태인 만큼 조금만 안 좋은 소식이 있으면 시장이 흔들릴 가능성은 항상 있어요.”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지난달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금리 인상을 감안하면 최근엔 금융시장 사고가 굉장히 안 터진 것”이라고까지 했다.

2008년 금융위기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2000년대 중반 5%포인트가 넘는 큰 폭의 정책금리 인상이 도화선이었다. 그러나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지금의 미국·유럽 내 은행발 금융 불안이 과거의 금융위기와는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고 말한다. 다만 불안과 공포에 의한 신용 위험이 급격히 전염되는 금융 산업의 특성상 안심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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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는 부동산 실물 경제 악화가 금융회사 간 단기 자금을 거래하는 ‘도매시장’을 덮친 사례다. 저신용자에게 무분별하게 대출을 내주는 비우량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과 이를 구조화한 금융 파생 상품의 부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대형 은행끼리 돈을 빌려주지 않는 ‘신뢰의 위기’를 촉발했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27일 “이번 은행발 금융 불안은 유동성 관리 실패가 원인이 됐다는 점이 과거와 다르다”라고 말했다. 실물 경제에서 파생된 투자 부실이 아니라 단기 예금을 유치해 장기 자산에 투자한 은행들의 자금 관리 부실이 불쏘시개가 됐다는 이야기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경우 미국 국채, 주택저당증권(MBS) 등 이른바 만기가 긴 안전 자산 투자가 금리 인상 여파로 대규모 평가 손실을 입으며 뱅크런(무더기 예금 인출)을 불렀다. 크레디스위스(CS·크레디트스위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크레디스위스도 과거 사모펀드 투자 손실 등으로 시장의 신뢰가 이미 훼손된 상태였다”며 “여기에 최근 예금이 빠져나가는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며 실리콘밸리은행과 비슷하게 위기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최근의 은행발 금융 불안은 이처럼 위기의 근본 원인과 확산 경로 측면에서 분명 과거의 금융위기와 다르다. 금융회사의 대규모 투자 손실과 이로 인한 단기 자금시장의 자금 경색보다는, 대규모 예금 인출로 인한 개별 은행발 위기에 가깝다.

금융 환경과 정책 대응도 다르다. 미국 연준과 유럽중앙은행(ECB)은 은행발 시장 불안이 불거진 뒤에도 정책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시스템적 위기는 없다”는 자평이 뒤따랐다. 은행 건전성이나 시장 사정이 과거 위기 때에 견줘 나은 것은 사실이다. 미국 금융시스템 내 중요도가 높은 대형은행(G-SIB)들의 기본자본비율(은행이 보유한 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은 현재 14.9%로 2008년 당시(7.4%)의 2배다. 은행끼리 빌려준 돈의 떼일 위험을 나타내는 ‘리보 금리-OIS(하루짜리 단기금리) 스프레드’ 등 금융지표도 과거 금융위기 때보다 훨씬 낮다.

그럼에도 시장의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시중의 유동성이 바짝 마르며 금융권의 ‘약한 고리’가 계속 나타날 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은행이 투자한 미 국채 등 안전자산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위험 자산 취급을 받으며 은행 건전성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게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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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도이체방크 본사 사옥.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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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신용평가는 이날 보고서에서 “금융 업종 중 가장 안전성과 신뢰도가 높은 업종인 은행에서 파열음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금융위기’가 시작됐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미국 등 정책당국의 위기 대응 경험과 능력은 분명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과거엔 없었던 모습과 형태의 또 다른 위기가 시장을 덮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스위스 금융당국이 크레디스위스 구제 과정에서 투자자들이 주식보다 안전한 자산으로 여겼던 이 은행의 조건부 자본증권(코코본드)을 휴지조각으로 만들며 코코본드발 신용 위험이 새롭게 대두한 것도 이런 사례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2008년 당시에도 연준이 금리 인상을 멈추고 1년여가 지나서 본격적인 투자 자산 부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만큼, 지금도 금융시장에 잠재된 문제들이 수면 위로 다 드러났다고 보긴 어렵다”며 “다만 한국의 경우 외환 보유고 확대, 대외 순채권국 전환 등으로 외환 쪽의 취약성은 금융위기 때보다 많이 개선된 편”이라고 짚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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