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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기자칼럼]‘에에올’과 아시아계 여성···다정함이 세계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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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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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담당 기자로서 책을 읽으면서 신날 때가 있다. 책과 책이 서로 만나 며 두 텍스트의 맥락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이해의 폭을 풍부하게 해줄 때다. 퍼즐이 맞춰지며 그림의 윤곽이 선명해지는 기분이랄까. 이번엔 책과 영화의 만남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에올)를 보면서 황승현의 <미국에서 찾은 아시아의 미>(아시아의 미·서해문집)를 떠올렸다. <에에올>은 아시아계 미국인 서사이자 모녀 서사·이민 1세대와 2세대의 서사·퀴어 서사 등 다양한 서사가 교직되며 다중우주만큼 다채로운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아시아의 미>는 중국계 이민자를 중심으로 미국에서 아시아의 미가 어떻게 재현됐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초기 중국계 이민자들은 어리석거나, 돈만 밝히거나, 남성성이 결여된 여성적 존재로 그려졌다. <에에올>의 주인공 에블린과 웨이먼드의 모습이 그렇다. 웨이먼드는 세상 물정 모르는, 물건에 인형 눈깔이나 붙이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그려진다. 에블린은 그와 반대로 생활에 찌들어 돈만 밝히는 인물로 회계 처리를 엉망으로 해 탈세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중국인’에게 덧씌워진 편견을 정확히 반영한 에블린의 가족은 정신없고 남루한, ‘추’의 영역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에게 세계를 구원하는 막대한 임무를 맡김으로써 그 편견을 보기 좋게-또 정신 없게- 비틀어낸다.

‘빌런’은 에블린의 딸 조이다. 어머니의 가혹한 훈련으로 정신이 파괴되어 다중우주 속에 분산돼 존재하는 그는 허무함에 빠져 세상을 파괴하려 한다. 현실 속 조이 또한 이민 2세대이자 퀴어로서 몰이해 속에 상처받는다. 에블린은 조이가 퀴어인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어 살이 쪘다’고 타박하거나 타투를 했다고 비난한다. 미국 문화에 더 익숙한 자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민 1세대의 전형이다.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세상과 자신마저 파괴하고 싶어 하는 조이의 증상은 우울증에 가깝다. ‘왜 태어났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본디 고통받는 약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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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한 장면. 에블린의 딸 조이는 ‘조부 투바키’로 세상을 파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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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회는 ‘조이’ 같은 사람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오늘을 넘는 아시아 여성>아시아 여성·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을 보면 코로나19로 증가한 아시아인 혐오 범죄의 최대 피해자는 아시아계 여성으로, 2020년부터 일어난 아시아인 혐오 폭력 피해자 중 70%를 차지했다. 동아시아계 여성, 성소수자, 가난한 계층의 여성이 폭력에 가장 많이 노출됐다. <아시아의 여성>에서 노고운은 서구 사회가 감염병을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해온 ‘감염병의 타자화’를 이야기하며 코로나19의 경우 아시아계 여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고 지적한다.

모델 마이너리티(모범적 소수민족)로서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교육열과 근면성으로 성공을 이룬 아시아계 미국인을 지칭하는 ‘모델 마이너리티’ 개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구조적·제도적 불평등을 은폐하는 도구로 쓰였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분노가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해 분출하기도 했다. LA폭동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세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조이의 시도도, 아시아계 여성을 향한 폭력도 ‘사랑’ 앞에선 힘을 잃는다. <에에올>에서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면, <아시아 여성>에선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들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연대하며 인종주의 전체에 반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블랙라이브스매터(BLM)’와 ‘아시안라이브스매터(ALM)’가 거리에 함께 울려퍼졌다. 혐오와 폭력에 대한 최대 무기는 다정함, 곧 연대와 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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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문화부 차장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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