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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손호철 칼럼] 철인왕 윤석열의 위험한 순교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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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 한·일 정상회담으로 여론이 싸늘하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한·일관계 개선은 여론과 관계없이 옳은 일이고 꼭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므로 여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자랑한다. 이완용이 나라를 바치고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데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꼴이다.

경향신문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이미 “지지율이 10%로 떨어져도 한·일관계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뉴스를 보자 떠오른 것이 2007년 마치 ‘순교자’처럼 노무현 정부라는 ‘친북좌파’에 의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의 일념에서 대선에 출마한다는 박근혜(당시 의원)의 선언을 듣고 썼던 글이다. “순교자주의란 여론 등과 상관없이 자신이 옳은 일을 위해 순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종교인에게는 중요한 덕목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의 경우 민주화투쟁 등에 있어서 필요할 때도 있지만 민심에 반하고 틀린 것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무데뽀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성향이다.”

그렇다. 윤 대통령이 강제징용 문제 등에 대해 굴욕적 양보를 했다는 사실도 문제지만, 이번 회담이 걱정스러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첫째, 그가 굴욕적 양보를 여론에 반하면서 순교자 자세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내린 ‘구국의 결단’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그만두고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지지율이 1%까지 떨어지더라도 할 건 하겠다’면서 언급했던 게 한·일관계의 정상화”라는 대통령실 측근의 말은 소름이 끼친다.

복잡한 한·일관계와 국제정치 문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평생 사건 조사·기소 등 검찰업무에 전념해온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정치를 시작하며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보면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시켜줘서 고맙다고 일본 총리에게 무릎 꿇고 큰절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 독도를 양보하겠다고 각서를 쓰지 않은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 다른 우려는 윤 대통령이 비판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주의에 빠져 굴욕적 양보를 한 이유이다. 이는 미국이 이를 바라고 있고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북핵 등 “최근 엄중한 한반도 및 지역, 국제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일과의 동맹을 본격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번 양보는 미·일동맹 대 중국의 경쟁, 북핵 위기 속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미·일 편에 서겠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윤 대통령이 대선 토론회에서 우리 땅에 “유사시에 (자위대가) 들어올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한 것은 단순히 말실수가 아니라 진심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생존이 걸린 사활의 문제로 미·일동맹에 전력투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는 정치권과 학계, 나아가 시민사회에서 많은 논쟁을 통해 합의를 만들어내야 하는 주제이지, 검찰 출신의 초보정치인, 그것도 24만표 차이로밖에 이기지 못한 대통령이 자기도취적 순교자주의에 의해 무데뽀로 밀어붙일 문제가 아니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민중들의 지배체제인 ‘민주주의’를 우매한 다수에 의한 ‘우민정치’라고 비판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아는 철학자가 지배하는 ‘철인왕’ 체제를 옹호했다. 윤 대통령 역시 과거에 연연하는 우매한 다수 민중과 달리 자신은 무엇이 국민들을 위한 것이며 무엇이 국익인지를 아는 철인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윤 대통령 임기 초기 “가장 위험한 대통령은 민심을 무시하면서도 국민을 위한다는 소명의식에 충만해 엉뚱한 방향으로 국민을 이끄는 대통령”이며 “지금같이 할 바엔 차라리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문제는 대통령을 제어해야 할 정치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당은 ‘내시정당’에 불과하고, 더불어민주당은 다수 의석에도 불구하고 당대표의 사법리스크로 별로 힘이 실리지 않는다.

여론 역시 지금은 치욕적인 양보로 들끓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기소, 재판 등 이재명 사법드라마에 묻히고 말 가능성이 크다. 주저하는 측근들에게 윤 대통령이 ‘정치 9단’처럼 했다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어차피 할 것 아니냐. 그러면 미리 매를 맞는 게 낫지, 내년 총선을 앞두고 할 것인가?” 답답한 일이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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