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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한 나라에 '두 시간대'···혼란 원흉은 정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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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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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 국가인 레바논에서 서머타임을 두고 종교 간 이견이 발생하면서 두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는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2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임시 총리는 지난 23일 올해 서머타임 적용을 기존보다 한 달가량 늦춰 다음 달 20일부터 시작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레바논에서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통상 3월 마지막 주말부터 서머타임을 적용해왔다.

관행을 깬 미카티 총리는 이런 결정에 관해 구체적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시아파 무슬림인 나비 베리 국회의장이 수니파 무슬림인 미카티 총리에게 이슬람 금식월인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 시간이 한 시간 일찍 끝나도록 서머타임 시행을 연기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현지 매체는 분석하고 있다.

이슬람의 금식월인 라마단(이슬람력 아홉 번째 달)에 무슬림들은 해가 떠있는 동안 금식하며 스스로를 절제하고 해가 져서야 비로소 먹는다. 서머타임을 적용하게 되면 금식을 깨는 시간이 저녁 6시에서 저녁 7시께로 한 시간 늦춰지는 것이다.

이슬람교 관련 기관들과 정당들은 즉각 미카티 총리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레바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마론파 기독교계는 미카티 총리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24일 밤부터 서머타임을 적용하기로 했다.

마론파 교회 측은 "(라마단 기간을 서머타임에서 제외하는 조치에 대한) 사전 협의가 없었다. 이 조치는 국제 기준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종파 간의 다툼으로 2개의 시간대가 공존하게 되자 시민들과 산업 현장도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됐다. 정부 결정에 따라야 하는 공공기관과 공기업들은 서머타임 적용을 미뤘지만 일부 기업들과 학교·언론 매체들은 이번 주말부터 서머타임에 돌입했다.

레바논 항공사인 미들이스트에어라인은 근무시간 등에 겨울 시간대를 유지하되 비행 스케줄은 국제 기준에 맞추기로 했다는 입장이다.

국영 통신사는 휴대전화 등 기기의 시간 표시에 서머타임이 자동 적용된 경우 수동으로 시간을 조정하라는 메시지를 고객들에게 발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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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종파간 장기 내전을 치른 후 세력 균형을 위한 합의에 따라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각각 맡는 독특한 권력분점 체제를 수립했다. 언뜻 ‘황금 비율’ 같은 권력분점은 결국 정치권 및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낳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2019년 경제 위기가 본격화한 레바논은 코로나19 팬데믹·베이트루 폭발 사고·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치며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지난해 세계은행은 레바논의 경제 위기가 1990년대 이후 세 번째로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레바논은 현재 인구의 4분의 3이 빈곤층인 암울한 상황임에도 지난해 10월 미셸 아운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지도자를 선출하지 못했다. 자력으로 대통령을 뽑을 만큼 원내 의석을 확보한 정치 세력이 없는 데다 후보에 대한 종파 간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 전 베이르투 폭발 참사 이후 임시 총리 체제가 이어지고 있다.

앞서 레바논은 지난 2014년 5월 미셸 술레이만 전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 물러난 후에도 정파 간 갈등으로 2년 넘게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한 전례가 있다.

김태원 기자 reviva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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