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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영웅’ 되어 돌아온 범죄자···“살인자를 영웅으로 만드나” 러 지역사회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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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너 ‘죄수’ 출신 전사자 고향으로

러 애국주의 강화 분위기 속에

‘영웅’ 칭호 두고 지역사회 분열

계약종료 용병 수천명도 사면···지역사회로

경향신문

지난해 9월 러시아 볼고그라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사한 와그너 그룹 지휘관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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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로 떠난 이들이 ‘영웅’이 돼 고향에 돌아왔다.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는 것이 국가가 부여한 ‘애국적인 의무’지만, ‘영웅’ 칭호를 부여받은 옛 이웃이 저지른 범죄를 잊을 수 없는 이들은 다시 한 번 고통의 시간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된 러시아의 민간용병기업(PMC) 와그너 그룹 전사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며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와그너 그룹의 죄수 출신 전사자 시신이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속속 돌아오고 있지만, 이들에게 ‘영웅’의 칭호를 부여하는 문제를 두고 지역사회가 분열하는 등 러시아 전역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고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강화된 애국주의적인 분위기가 이런 갈등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전쟁 이후 러시아 학교들에선 ‘현대 러시아의 영웅’이라는 이름의 애국 수업이 신설됐고, 일부 학교 벽에는 사망한 와그너 용병들을 기리는 명판이 새겨졌다.

당장 전사한 이들의 장례 절차를 두고 곳곳에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NYT에 따르면 일부 마을은 와그너 용병의 장례식에 의장대를 배치하는 것을 거부했고, 다른 마을에선 유족들이 조문객을 맞이하기 위해 공공장소를 사용하겠다는 요청을 거부했다. ‘영웅’이 돼 돌아온 전사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유죄 판결을 받아 수감됐던 ‘죄수 출신’ 용병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거나 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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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지역 바킨스카야 마을에 조성된 와그너 용병들의 공동묘지.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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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남서부 로스토프 지역에선 바흐무트에서 전사한 용병 로만 라자루크가 지역 ‘영웅의 골목’에 묻혀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그는 2014년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를 잔혹하게 살해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살해된 누이의 친구는 지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마련된 묘지에 범죄자를 매장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며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갔고,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영웅인가?”라고 말했다.

반면 전사한 용병들의 유족과 크렘린이 주도하는 애국주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려는 일부 관리들은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를 하지 않는 주민들을 향해 “반역자”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NYT는 보도했다. 와그너 그룹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와그너 전사자들을 기리지 않는 주민과 지역 관리들을 “쓰레기”라고 맹비난하면서 “그들의 아이들의 코를 끌어내 우크라이나에서 싸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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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인 지난해 12월24일 와그너 그룹 전사자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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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러시아에 있는 인구 4200명의 광산마을 즈히레켄에선 불과 2년 전 살인을 저질러 수감됐던 와그너 전사자의 장례식 문제를 두고 주민 간 갈등이 벌어져 행정기관이 개입하기도 했다. 마을의 어린이 레크레이션센터를 장례식 장소로 제공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이 지역 공무원인 엘레나 코도디바는 “마을의 절반이 ‘이제 살인자를 영웅으로 만들 것인가’라며 반대하지만, 다른 절반은 ‘그는 피로써 죄를 속죄했다’고 찬성했다”고 말했다.

이런 갈등은 와그너 그룹이 러시아 전역의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을 대거 용병으로 모집하는 것을 러시아 정부가 용인하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러시아는 지난해 ‘30만명 부분 동원령’을 내렸음에도 전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와그너 그룹을 우크라이나 전장에 공격적으로 투입했다. 와그너는 죄수들을 용병으로 모집하며 러시아 사병의 두 배 이상 많은 월급과 6개월 복무하면 사면해준다는 대가를 제시했다. 러시아 정부의 승인이 없다면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미 정보 당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된 와그너 용병 5만명 가운데 4만명이 이렇게 모집된 죄수 출신으로 보고 있다. 현재 죄수를 상대로 한 용병 모집은 러시아 정부의 제재로 중단된 상태다.

와그너 그룹과 계약이 종료돼 사면된 죄수들이 민간인 신분으로 지역사회에 복귀하면 또 다른 사회 문제가 초래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프리고진은 25일 “현재까지 와그너 그룹과 계약을 마친 뒤 사면 석방된 이들이 50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프리고진은 사면된 이들의 재범률이 0.31%로, 일반적 통계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영국 국방부는 향후 몇주 안에 와그너의 죄수 출신 용병 수천명이 사면될 것으로 보인다며 “잦고 충격적인 전투 경험을 가진 폭력적인 범죄자들의 갑작스러운 사회 유입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 사회에 중요한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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