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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이승만 선택 옳았다"… 한·미동맹 70주년 맞아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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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탄신 148주년 맞아 이화장에서 기념식

박민식 "過보다 공적 커… 평가 바로 세워야"

올해로 한·미동맹이 70주년을 맞은 가운데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1953년 10월1일 두 나라 간 동맹의 근간이 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성사시킨 이승만 초대 대통령(1948∼1960년 재임) 탄신일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 대통령이 만든 토대 위에 이뤄졌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는 26일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 대통령 탄신 제148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행사에는 박 보훈처장을 비롯해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장(전 국무총리), 박진 외교부 장관,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김문수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1875년 3월26일 황해도에서 태어난 이 대통령은 1904년 미국으로 유학해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데 이어 정부수립 후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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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26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 제148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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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15 부정선거와 그에 반발해 일어난 4·19 혁명 때문에 이 대통령은 ‘독재자’라는 딱지가 붙은 채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온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날 박 처장은 “비록 과(過)가 있지만 너무나 크고 큰 공적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북한과 대한민국을 비교해 본다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선택했던 그 길이 올바른 길이었다”며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야말로 바로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출범 초기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방향 설정, 6·25전쟁 당시 유엔군 파병,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이 대통령의 공적을 일일이 나열했다.

마침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이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높은 평가를 받는 모습이다. 6·25전쟁 후반부에 이 대통령은 미국, 영국 등 우방이 강력히 요구하는 휴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그런 이 대통령을 달래고 또 안보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고자 ‘한국이 또 군사적 위협을 받으면 미국이 개입해 한국을 지킨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동의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1일 성사된 이 조약을 계기로 발족한 한·미동맹은 이후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미국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해 오는 4월 말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의 국빈방문(State Visit)을 초청한 상태다.

이 점을 의식한 듯 박 처장은 “진영을 떠나 이제는 후손들이 솔직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을 재조명할 때”라며 “그것이 건국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의무일 것이고,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1919년 갓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여했던 이 대통령은 광복의 그날까지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특히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을 맡아 미 백악관과 국무부를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달라”고 요구하는 교섭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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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열린 이승만 대통령 탄신 제148주년 기념식에서 황교안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장(앞줄 오른쪽) 등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황 회장 왼쪽으로 박진 외교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 등이 눈에 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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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후 귀국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1948년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다만 1960년까지 10년 넘게 장기집권한 것, 그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 일부가 훼손된 것, 또 측근들이 각종 비리와 부패를 저지른 것은 이 대통령이 국민적 비판과 저항에 직면하는 원인이 되었다. 1960년 3월15일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온갖 부정이 저질러진 점이 드러나며 분노한 시민들은 4·19 혁명을 일으켰다. 이에 이 대통령은 전격 하야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망명해 하와이에서 노년을 보냈다. 그는 박정희정부 시절인 1965년 7월19일 90세를 일기로 서거한 뒤에야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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