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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타고난 살인자’는 영화에나···” 범죄자를 변화시킨 건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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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프리즌 서클>의 TC 프로그램이 시행된 곳. 원형으로 배열한 의자에 앉아 참여자들이 대화를 나눈다. (C)2019 Kaori Sakag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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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서클> 펴낸 사카가미 가오리 인터뷰
동명 다큐멘터리 영화로 일본 문화기록영화대상 수상
시네마 아사히 교도소에서 이뤄진 ‘회복공동체’ 프로그램
일본 최초 교도소 내부 10년 장기 취재


“‘타고난 살인자’라는 건 호러영화 같은 이야기죠. 대중매체에선 ‘범죄자=사이코패스’라는 구도를 만들어내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일본 교도소에는 절도·사기·약물 등의 죄를 저질러 복역중인 사람이 대부분이지 인명과 관련한 심각한 죄를 저지른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범죄자’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사기, 강도상해, 절도, 상해치사…. 가볍게 볼 수 없는 범죄들이다. 가해자는 죄값을 치를 것을 요구받는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감독 사카가미 가오리는 <프리즌 서클>(다다서재)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가해자는 어떻게 가해자가 됐으며, 죄값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목표로 치러져야 하는가? 범죄자는 그저 악인인가, 아니면 폭력과 범죄의 길에 빠지기까지 누구 하나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구체적 개인인가?

책 출간을 기념해 사카가미 감독을 e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우리는 노력하는 출소자의 모습을 목격할 일이 거의 없다. 뉴스 등에 나오는 것은 다시 범죄를 저지른 사람뿐,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힘내는 사람들은 다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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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서클>을 펴낸 사카가미 가오리 감독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보호자를 비롯,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C)2019 Kaori Sakag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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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 관한 영화가 아닌, 대화에 관한 영화”
어린시절 학대 속에 폭력을 배우며 ‘폭력의 연쇄’
대화를 통해 억눌린 감정과 기억 되찾아
자신의 죄를 대면하고 피해자에 공감하며 변화


책에 등장하는 다쿠야, 마사토, 쇼, 겐타로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이 저지른 죄와 살아온 환경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들은 태어나서 교도소에 오기 전까지 비슷한 경로의 비탈길을 굴러떨어졌지만 나갈 때는 전혀 달랐다. 이들의 삶은 교도소에 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프리즌 서클>은 일본 최초로 교도소 내부를 10년간 장기 취재한 사카가미 감독의 르포르타주다. 동명의 영화를 바탕으로 쓴 책으로 영화는 일본에서 문화기록영화대상을 타며 화제를 모았다.

책의 중심에는 아사히 사회복귀촉진센터의 갱생 프로그램 회복 공동체(Therapeutic Community, TC)가 있다. 수용자를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며 동그랗게 둘러앉아 대화를 통해 잊혀져버린 과거, 억눌린 감정을 되살리며 최종적으로 자신의 죄와 대면한다.

사카가미 감독은 <프리즌 서클> 이전에 미국의 아미티 교도소에 도입된 TC를 다룬 <라이퍼즈>를 제작했다. 그는 “교도소라는 엄벌의 장소에서도 회복과 복구를 위한 시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했다”고 말했다.

“<프리즌 서클>의 무대는 교도소지만, ‘교도소에 관한 영화’는 아니다. 서로 대화하는 것(듣는 것/말하는 것)의 가능성, 그리고 침묵을 깨는 것의 의미와 그 방법을 생각하기 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회복 프로그램에서 거창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기와 듣기. 하지만 교도소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은 생애에서 진정한 말하기와 듣기를 경험한 적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폭력과 성적 학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학교 폭력 등을 당하며 생존 수단으로 폭력을 ‘학습’했다. 이를 ‘폭력의 연쇄’라고 부른다. 이들은 처음엔 감정을 알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회피한다.

미국 아미티 프로그램의 창설자 나야 아비터는 “그들은 대단히 좁은 감정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화내거나 우울하거나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하며, 자신의 체험에 어떤 의견이나 이름도 부여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한다.

TC에서는 ‘이모셔널 리터러시(감정 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대화가 이뤄진다. 아비터는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깨닫고 공감할 수 있게 되어 공포와 분노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라며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폭력으로 말을 대신해버린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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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즌 서클>의 한 장면. (C)2019 Kaori Sakag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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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안 난다”던 어린 시절의 학대
8개월 대화 속에 자신의 언어로 쏟아내며 변화
재일조선인 등 차별받아온 이들이 범죄로 빠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으면 반성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다쿠야는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다. 사기죄와 사기미수죄로 징역 2년4개월을 선고받은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라 어린 시절은 “별로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다쿠야는 시종일관 가벼운 태도를 보였지만, TC를 통해 고통스러운 과거의 학대 기억과 대면한다. 심각한 가정폭력과 시설 내 폭력 속에서 그는 폭력을 학습했다. 처음에 학대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그는 7~8개월을 거쳐 간신히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해낸다. 마침내 다쿠야가 억지로 묻어버린 기억을 꺼내 쏟아내듯 이야기한 순간을 사카가미는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았다. “다쿠야의 이야기를 TC 훈련생들이 ‘증인’이 되어 들어주는 모습에도 전율했습니다.”

교도소엔 구조적 차별과 배제로 사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도 있다. 박은 재일조선인 출신으로 그의 범죄 연표는 ‘내가 일본인이 아닌 것이 알려지다(6세)’로 시작했다. 그는 “내가 이 세상의 방해물이었구나 생각했다”며 “외국인이면 당시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성실하게 해봤자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카쿠라는 부락 출신이다. 일본에 봉건적 신분제가 있던 시기 가축 도살과 시체 매장 등의 일을 했던 최하층 사람들이 살던 지역으로 극심한 차별의 대상이 됐다. 그의 아버지는 부락 출신이라는 게 알려져 대형 식품회사에서 나와 대우가 열악한 곳으로 이직할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 출신 ‘소수파’인 쇼가 최선을 다해 주류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폭발해 사람을 해친 이야기를 들려주자 박은 말한다. “이렇게 뿌리에 있는 걸 서로 이야기하는 곳이구나. 그때부터였어요. 확 빨려 들어가듯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기 시작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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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서클>에 등장하는 다쿠야가 지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모래 그림. 다쿠야는 자신을 ‘거짓말쟁이 소년’으로 묘사하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살고 싶다”는 소년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며 변화하는 것으로 끝난다. (C)2019 Kaori Sakag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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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서로 들어주는
마음이 쉴 만한 안전한 장소 ‘생크추어리’
사카가미 자신도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
영화를 통해 치유와 회복을 이뤄


비슷한 아픔을 가진 이들끼리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묵묵히 증인이 되어 들어주며 이들은 생애 가장 ‘안전한 장소’를 경험한다. 책에선 이를 생크추어리(Sanctuary), 마음이 쉴 만한 안전한 장소라고 부른다. <프리즌 서클>은 커다란 집단 치유 프로그램과 같다. 사카가미 역시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으며, 동시에 남동생에 대한 가정폭력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다. 사카가미는 “<프리즌 서클>을 본 관객들이 ‘바깥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생크추어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제가 영화와 집필 활동을 통해 호소해왔던 것이 바로 생크추어리(서로 본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의 중요성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본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약한 소리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거나 주위 시선을 신경쓰는 사회에서는 더욱 어렵죠. 내 이야기를 누군가 귀 기울여 들어준 경험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에도 서투릅니다. 타인의 존재와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생크추어리가 줄어드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의 피해성’을 다루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사카가미는 “과거에 심각한 피해를 경험했다고 해서 가해 행위가 정당해질 수도 없고 면죄부를 받아서도 안된다”면서도 “가해 행위의 배경에 수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사회에 널리 공유될 필요가 있다. 엄벌적 사고가 강한 사회는 피해자의 복수심을 부채질하며, 오히려 회복을 방해한다.”고 말했다.

‘시마네 아사히’의 TC 수료생과 일반 수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결과, TC 수료생의 재입소율은 9.5%로, 일반 수용자 재입소율 19.6%와 비교하면 절반 이하에 불과했다. 재입소를 한다고 해도 TC 수료생이 더 오랜 기간 사회에서 생활했다.

책에는 저자가 미국에서 경험한 ‘회복적 사법’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사건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대화하는 프로그램으로 지역 사회 사람들이 함께 한 가운데 피해자가 말하고, 가해자가 사죄한다. 죄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지를 공동체 내에서 함께 대화로 결정한다.

교도소에서 만들어진 생크추어리는 담 바깥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정기적으로 만나며, 새로운 출소자와 연결해준다. 사카가미도 이 생크추어리 안에 있다. <프리즌 서클> 영화 개봉은 책의 등장인물에게도 긍정적 변화가 되었다. “쇼와 마사토는 관객들의 대화에 참가하며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어요. ‘꿈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던 쇼는 출소 뒤 하고 싶은 일이 많이 생겼고 지금은 여행사 가이드로 일하고 있죠.” <프리즌 서클>은 범죄자와 교도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변화와 갱생을 돕는 사카가미의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2020년부터 일본 지방에 있는 소년원과 지역사회가 랩을 통해 교류하는 실험적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그 모습을 촬영해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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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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