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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구현모, 윤경림… KT 잔혹사와 외풍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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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린 기자]

KT, 포스코 등 이른바 '주인 없는 기업'은 2010년대 초반까지 관치와 외풍, 낙하산의 희생양이었다. 권력자들은 툭하면 이들 기업에 입김을 불어넣거나 낙하산을 투하했다. 이런 고질병을 없애기 위해 '주인 없는 기업'은 나름대로 시스템을 혁신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그 시스템 위에서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더스쿠프의 視리즈, 소유분산기업과 권력 그 첫번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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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불어온 외풍이 KT의 기둥뿌리를 흔들고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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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총 시즌을 맞아 사령탑을 교체하는 기업이 부쩍 늘어났다. 주총 때 경영진 교체는 흔한 일인데도 이번엔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더 많이 받는다.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이 교체의 도화선이 된 기업이 적지 않아서다.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돈 건 지난해 12월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이 업계의 예상을 깨고 3연임 도전을 포기하면서다. 조 회장은 외형과 내실을 다지며 신한금융을 리딩뱅크 자리에 올려놨다는 점을 인정받아 연임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던 인사였다. 조 회장이 내건 사퇴 명분은 '세대교체'였지만, 채용 비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전력이 부담으로 작용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이유는 금융감독당국 수장의 말이었다. 조 회장이 연임 포기를 밝히기 전,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과의 간담회에서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유능한 경영진의 선임은 이사회의 가장 중요한 권한이자 책무"라면서 "CEO 선임이 합리적인 경영승계 절차에 따라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수장이 차기 CEO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조 회장의 행보에 제동이 걸렸다는 건데, 신빙성이 없진 않다.

공교롭게도 조 회장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올 1월 손태승 우리금융그룹 회장이 연임을 포기했을 때에도 금융당국의 압박이 상당했다. 손 회장은 앞서 금융위로부터 라임자산운용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를 두고 문책경고의 중징계를 받았다.

연임에 나서려면 효력정지 가처분이나 행정소송을 제기해야 했는데, 이를 두고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소송 논의에 굉장히 불편함을 느낀다"고 발언했고, 이복현 금감원장은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징계를 수용하고 연임을 포기하란 메시지였다.

손 회장은 "우리금융 회장 연임에 나서지 않고 최근 금융권 세대교체 흐름에 동참하겠다"면서 물러났다.

정권과 정치권의 입김이 인사 문제에 영향을 미친 건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월 낙마한 구현모 KT 대표를 향한 압박 수위는 이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연임 도전을 공식화한 구 대표를 겨냥해 다양한 이들이 연임 포기 메시지를 쏟아냈다.

"소유구조가 분산된 기업을 향한 주주권 행사를 강화해야 한다(12월 8일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구현모 대표를 최종후보로 결정한 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했다(12월 28일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민영화 이후 소유가 분산된 기업의 지배구조를 선진화해야 한다(1월 30일 윤석열 대통령)" "구현모 대표는 쪼개기 후원 논란이 있는데도 필터링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1월 30일 김영식 국민의힘 의원)"….

전방위적인 '사퇴 몰이'에 구 대표는 KT 이사회에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구 대표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두번이나 연임 적격 판정을 받고도 연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적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KT의 체질을 디지털 플랫폼 기업(Digicoㆍ디지코)으로 전환한 건 구 대표의 성과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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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인사를 향한 정치권의 압박은 KT에서 그치지 않을 공산이 크다. 포스코와 KT&G의 수장인 최정우 회장과 백복인 사장은 내년 3월이면 임기가 종료되는데, 연임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두 기업은 KT와 마찬가지로 '소유분산기업'이다. 소유지분이 잘게 분산돼 뚜렷한 대주주가 없다. 과거 정부 투자기업 내지는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하면서 소유가 분산됐다. 정치권 같은 외부 입김에 휘둘리기 쉬운 구조였고, 실제로 시달려왔다.

특히 최정우 포스코 회장을 둘러싼 설이 분분하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 시절 임명된 최 회장과 일정한 거리를 둬왔다. 최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500여명의 CEO급 기업인이 참가한 '2023년 경제계 신년 인사회'에 불참했다. 윤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ㆍ스위스 순방에 동행했던 100여명 규모의 경제사절단에도 합류하지 않았다.

최근 열린 '한일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한 국내 기업인 12명의 명단에서도 최 회장의 이름은 빠졌다. 이를 두고 "대통령실이 의도적으로 (최 회장을) 배제했다"는 관측이 쏟아진 건 과한 해석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최 회장 이전에 포스코를 이끌던 회장 8명은 모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특히 정권 교체기와 맞물려 밀려나는 모습을 보이면서 최 회장이 남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어두운 전망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이처럼 정권만 바뀌면 기업의 수장까지 흔들리는 이유는 뭘까. 기업 수장을 뽑는 기업 자체 시스템이 허술한 탓일까, 아니면 정치권의 탐욕 때문일까. 지금부터 답을 찾아가 보자.

■과연 시스템 탓일까 = 일부에선 "기업들이 외부 간섭을 막을 경영 및 검증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KT, 포스코, 금융그룹 등 소유분산기업이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놓지 않은 탓에 외풍外風에 시달리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보면 '시스템 미비'를 탓하긴 힘들다. ESG 전문가들은 KT, 포스코, KT&G 같은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가 제도적으론 문제가 없다고 강조한다. 이들 기업은 2021년 한국기ESG기준원 주관 ESG평가에서 우수한 등급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중 KT와 포스코는 지배구조 부문 최우수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ESG 전문가는 "이사회가 분리돼 있고 CEO 추천위원회가 별도로 구성돼 있는 데다 공정하고 중립적인 이사 선임 과정이 보장돼 있다"면서 "실제로 제도가 작동하느냐는 별개의 문제긴 하지만 (CEO 선임 과정에서 진통이 발생한 건) 시스템을 갖춰놓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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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했지만 외풍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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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포스코는 차기 회장 선출 작업을 '승계카운슬'에 맡기고 있다. 독립성이 담보된 사외이사들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승계를 논의할 수 있도록 만든 조직이다. 승계카운슬은 회장 후보군을 선발하고 이를 포스코 CEO후보추천위원회에 회부한다.

CEO후보추천위원회는 후보들 중 최종 후보 1인을 추려 주총에 추천하고, 안건이 통과하면 후보 1인이 회장에 오른다. 2000년 민영화 이후 CEO 잔혹사를 숱하게 겪어온 포스코가 투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장치였다.

KT 역시 2018년 정관을 고쳤다. 과거 'CEO추천위원회→주주총회' 2단계를 거친 CEO 선임 과정을 '지배구조위원회→대표후보심사위원회→이사회→주주총회' 등 4단계를 거치도록 바꿨다. 과정을 세분화하고 체계화해 외부 인사가 낙하산처럼 꽂히는 걸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KT호號의 수장에 오른 구 대표는 외풍에 시달린 끝에 연임 포기를 선언했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 최종후보에 오른 구 대표를 내려 앉힌 KT는 모든 과정을 오픈하고 진행하는 경선으로 전환한 끝에 윤경림 KT 그룹트랜스포메이션 부문장(사장)을 내정자로 낙점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KT 흔들기'는 계속되고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그들만의 리그"라면서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고, 대통령실도 "조직 내에서 도덕적 해이가 일어나고, 그 손해는 우리 국민이 볼 수밖에 없다"고 거들었다.

검찰은 KT텔레캅 일감 몰아주기, 불법 지원, 사외이사 접대 등 구현모 대표와 윤 부문장에게 제기된 비위 혐의를 둘러싼 수사에 착수했다. 당장 내정자에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이 조성된 셈이었다. 윤 부문장이 "논란이 되고 있는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이슈와 과거 관행으로 인한 문제들을 과감하게 혁신하겠다"면서 '더 나은 지배구조'를 약속했는데도 분위기는 바뀌지 않고 있다.

KT는 최근 윤 부문장의 요청으로 지배구조개선TF를 구성했다. 이 TF는 대표이사 선임절차와 이사회 구성, ESG 모범규준 등 여론으로부터 지적받은 사항을 중심으로 지배구조 강화 방안을 모색한다. 하지만 윤 부문장을 마뜩잖게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여권이 밀던 정ㆍ관계 출신 인사가 선임되지 못한 탓"으로 분석하고 있다.

가뜩이나 KT가 속한 이동통신시장은 정부가 개입하기 용이한 대표적인 규제 산업이다. 주요 수익모델인 이동통신 요금제부터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한다. 애초에 이동통신사가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근간인 '주파수'를 정부로부터 할당받는다. 지난해 말 KT는 할당받은 5G 28㎓ 주파수를 다시 반납하기도 했다.

인프라 투자가 미흡했다는 이유였는데, 이처럼 정부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KT의 근간을 쥐고 흔들 여지가 많다. 정치권 안팎에서 이런저런 비판을 받아온 윤 부문장은 결국 주주총회를 앞두고 이사회에 후보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의를 표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정우 포스코 회장의 앞날도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이미 최정우 회장은 지난해 9월 포항제철소를 덮친 태풍 '힌남노' 사태 때문에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제철소 가동 중단'이란 사상 초유의 사태로 조 단위 손실을 봤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선 최 회장을 둘러싼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추궁을 당했다.

어쨌거나 최 회장도 임기를 완주하기 위한 대응책을 꺼내 들긴 했다. 최근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글로벌 기업의 선진 사례와 비교해 포스코그룹의 지배구조를 보완할 점이 있다면 이를 적극 반영하겠다"며 "국내외에서 모범이 되는 지배구조를 갖춘 대표적 회사로 거듭나겠다"면서 '선진지배구조TF'를 외부 전문기관과 함께 발족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고경영자 및 사내ㆍ외 이사 선임 프로세스부터 이사회 운영 등 그룹 지배구조 전반을 검토하기로 했다. 지배구조 전반을 개선해 올해 말 본격화할 차기 CEO 선임 과정에 정치권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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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깐깐한 '오픈 경선'을 벌이고도 외풍에 시달린 KT의 사례에 비춰보면, 이런 조치가 외부 입김을 막는 데 얼마나 효과적일 지는 미지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국 사회는 여전히 관官의 힘이 세다. 기업이 시스템을 갖춰도 외풍에 서 온전히 자유롭기란 불가능하다. 정부는 이들 기업을 국정 철학 입맛에 맞는 기업으로 유도하겠다는 건데, 지금은 관 주도의 성장 모델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소유분산기업 인사권 개입에 여론의 반발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제도적으로 정부 또는 정치권의 입김이 전달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다음 편에서 찾아보자.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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