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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숨] 정년이,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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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매란국극단’ 단원들의 실루엣이 보이고, 그들이 노래를 시작하자나는 속절없이 감동을 받아버렸다. 상상 속 목소리가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고 웃고 우는 그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본 것만으로도 어쩐지 울컥하게 되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신예슬 음악평론가


<정년이>는 네이버에서 연재된 웹툰으로 1950년대, 소리 하나 믿고 상경한 목포 소녀 정년이가 ‘매란국극단’이라는 여성국극단에 들어가며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야기는 꿰고 있었지만, 막상 이를 국립극장에서 공연으로 보는 일은 조금 생경했다. 저 시대의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무대에 올라 자유롭게 춤추고 노래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극장에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과거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일은 반갑고도 낯설었다.

창극 <정년이>는 웹툰에서 펼쳐졌던 긴 서사를 압축해 놓은 형태였지만,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서사는 어쩌면 그야말로 고전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평범한 줄 알았지만 숨은 명창의 핏줄인 주인공, 쉽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인물들, 위험에 빠진 이를 구해주다 첫눈에 반하게 되는 사랑의 순간, ‘최고만 된다면 심장이 뚫려도 상관없어’라고 함께 노래하는 라이벌과의 대결이 있다. 숱한 모험담, 영웅담에서 보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왕좌를 차지하는 것으로 끝맺지 않는다. 인물들은 대단한 명예나 부를 좇아 움직이지도 않는다. 정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지키기 위해 이들이 무엇과 싸워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건 오디션에서 대결해야 하는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창극 <정년이>에서 극중극으로 무대에 오른 노래와 음악들은 그 싸움이 훨씬 복합적인 것이었음을 들려준다. 여성국극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가요가 흘러나오는 TV의 등장과 함께 그 인기가 위태로워지고 있었고, 관객의 발걸음은 극장이 아니라 영화관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허영서의 노래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는 사회 고위층과 맞닿아 있던 소프라노였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극본에 쓸 수 없었던 시대에, 권부용은 극작가였던 어머니의 이름이 어떻게 지워지는지를 본다.

그러니까 그건 목소리와 이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매진하고, 그것이 계속될 수 있도록 애쓰며, 최고가 되기 위해 몸을 불사르는 일이었다. <정년이> 속 인물들은 그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똑똑히 바라보고, 그들이 사랑하는 여성국극을 함께 사랑해 줄 동료를 찾고, 자신의 이름을 극본에 틀림없이 새겨 넣으며, 그들의 노래와 몸짓이 놓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를 택한다.

정년이와 매란국극단의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갈수록 정년이와 영서, 부용이의 이름으로 노래하던 국립창극단의 얼굴을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보게 됐다. 이것은 <정년이>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이소연과 조유아, 황윤정, 김우정, 김미진, 서정금, 민은경, 김금미, 이연주, 그리고 그 무대에 오른 모든 여성이 지녀온 그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정년이>는 그들 앞을 가로막을 것이 없는 것처럼 끝난다.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라고 선언하듯 노래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된 극중극으로서의 여성국극과 창극 <정년이>의 공연이 함께 끝나던 그 순간은, 무언가의 끝이 아니라 활짝 열리기 시작한 어떤 순간처럼 보였다. 아마도 이 공연으로부터 조금 더 찾아가게 될 과거 속 여성의 목소리들, 지금 힘차게 노래하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들, 그리고 이 공연을 보고 노래하기를 시작할 어떤 여성들의 목소리가 연결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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