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표현의 자유인가, 상표권 침해인가… 미 대법원 달군 ‘개 장난감’ 논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50년된 ‘아메리칸 위스키’ 대표주자 잭 다니엘

위스키병 본뜬 개 장난감 ‘배드 스패니얼’ 판매금지 소송

대법관들도 “웃자고 한 패러디”“짝퉁상품 범람 막아야” 의견 갈려

미국의 유명한 위스키 술병의 디자인을 본따 만든 개 장난감을 둘러싼 10년된 법적 분쟁이 미 최고 법원인 연방대법원에 상륙했다.

미 대법원은 지난 22일(현지시각) 테네시주 소재의 주류제조업체 잭 다니엘(Jack Daniel`s)사가 자사의 대표 위스키 병을 모방해 장난감 제조업체 ‘VIP’가 팔고있는 개 장난감에 대한 판매 금지 청구에 대한 최종심 첫 공판을 열었다.

잭 다니엘은 한국 등 세계에서 널리 판매되는 ‘아메리칸 위스키’의 대표주자다. 영화 ‘대부’에서 알 파치노가 병째 들이킨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생산 150년이 넘은 이 위스키는 미국에서 750㎖ 한 병에 20~30달러(3만원대) 안팎 하는 ‘가성비 위스키’이자 ‘가장 구하기 쉬운 위스키’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일보

아메리칸 위스키의 대표 주자인 테네시산 잭 다니엘은 30불 안팎의 '가성비 위스키'로 대중의 인기가 높다. 2017년 영화 '엘카미노 크리스마스'에서 배우 팀 앨런이 잭 다니엘 위스키를 병째 들이키는 장면. /엘카미노 크리스마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여년 전 장난감 업체 VIP가 잭 다니엘 위스키의 외형을 거의 똑같이 본뜬 개 장난감을 출시했다. 각진 몸체에 검정색의 라벨 디자인 등을 적용, 언뜻 보면 잭 대니얼 위스키처럼 보인다.

뜯어보면 완전히 다르다. 누르면 삑삑 소리가 나는 고무 소재의 이 개 장난감 라벨엔 스패니얼종의 개 그림이 큼직하게 그려져있고, ‘잭 다니엘’이란 상품명 대신 ‘배드 스패니얼’이 적혀있다. ‘올드 넘버7- 테네시 위스키’란 제품 표기는 ‘더 올드 넘버2(오줌이란 뜻)- 당신의 테네시 카펫 위에’로 변형됐다. ‘알코올 함량 40%’ 표기는 ‘응가 함량 43%’으로 바뀌었다.

‘병 안에 똥 섞인 개오줌이 들어있다’는 뜻의 적나라한 조크를 담은 이 개 장난감은 “당신이 위스키를 마실 때 반려견에겐 이걸 주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2013년부터 아마존 등에서 개당 20달러 안팎에 엄청나게 팔렸다. VIP는 다른 회사의 유명 술병이나 케찹병 등을 패러디한 개 장난감을 더 만들었다.

조선일보

장난감 제조업체 VIP가 제시한 '배드 스패니얼' 홍보사진. 스패니얼 종 개가 물고 장난칠 수 있는 개 장난감으로 '똥 섞인 개 오줌이 들어있다'는 장난스러운 문구가 포함돼있다. 누가 봐도 잭 다니엘 위스키를 모방 혹은 패러디한 제품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덕에 아마존 등에서 개당 20불 안팎에 엄청나게 팔렸다. /VIP 홈페이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4년 잭 다니엘은 “소비자로 하여금 위스키와 개 장난감을 혼동케 해, 우리의 오랜 명성을 해치는 상표권 침해”라면서 법원의 판매금지 명령을 받아냈다. 그러나 VIP는 “상표권 위반이 아니라 예술적 패러디·풍자일 뿐”이라며 맞섰다. 당시 애리조나 지방법원의 1심에선 잭 다니엘 손을 들어줬다. VIP가 항소하자, 이번엔 2심 샌프란시스코의 제9항소법원이 미 수정헌법 1조상 ‘표현의 자유’를 들어 VIP의 손을 들어줬다. 잭 다니엘은 “짝퉁 제조업자들이 ‘유머’를 빙자해 상표를 더럽히는 것을 못 막게 됐다”고 반발했다.

낙태나 총기 규제만큼이나 미 법조계 최대 난제 중 하나로 꼽히게 된 이 ‘잭 다니엘 개 장난감’ 사건이 22일 미 최고법원인 대법원에 가자, ‘지혜의 아홉기둥’이라 불리는 대법관 9명의 의견도 첨예하게 갈리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들은 전했다.

진보 성향 소니아 소토마이어 대법관은 이날 “정치적 농담이나 풍자를 할 때 특정 정당·정치인의 허락을 받지는 않는다”며 “VIP가 패러디를 하는데 제약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며 ‘표현의 자유’ 쪽에 섰다.

보수 대법관 새무얼 알리토도 “어느 누가 명백한 장난이 담긴 이 개 장난감을 보고 ‘잭 다니엘사가 이런 것을 만들었구나’ ‘잭 다니엘 위스키에도 개오줌이 든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겠냐”며 잭 다니엘 사의 판매금지 신청이 과도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이에 잭 다니엘 측 변호인이 법정에서 발끈해 “대법관님 예일대 로스쿨 나오셨죠? 정말 똑똑하고 논리적이시네요”라고 빈정댔다. 그러자 알리토 대법관이 “로스쿨 나오긴 했지만 거기서 법 배운 건 없고요,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라고 응수했다. 예일대 로스쿨 출신이 즐비한 법정에선 폭소가 터져나왔다고 한다.

조선일보

지난 22일 미 워싱턴DC의 연방대법원에서 '잭 다니엘 대 VIP' 사건 첫 심리 후 방청객들이 빠져나오고 있다. 10년 된 이 상표권 침해 사건은 법조계의 최대 난제 중 하나로 꼽히며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AF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반면 진보 성향 엘레나 카간 대법관은 이 개 장난감이 ‘표현의 자유’를 적용할 사상과 창작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유명 상품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짝퉁’에 불과하다고 봤다. 카간은 “내가 유머 감각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장난감이 제대로 된 패러디 같아보이지 않는다”며 “정치적 구호가 담긴 티셔츠도, 영화도, 예술 사진도 아닌 그냥 (잭 다니엘의 유명세에 얹혀)돈을 벌기 위한 평범한 상품 아닌가”라고 했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넣은 뒤샹의 작품은 기존 예술계의 문법을 전복하려는 전위적 메시지를 담은 ‘패러디 예술’로 인정받지만, 이 장난감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카간 대법관은 “앞으로 시장에 ‘도기 워커(조니 워커 모방)’ ‘마운틴 드룰(마운틴 듀 모방)’ 같은 짝퉁 제품이 나올 때마다 ‘표현의 자유’로 허용할 것인가”라고도 했다.

대법원은 이날 프랑스 명품 루이뷔통의 가방을 본따 만든 ‘츄이(Chewy)뷔통’이란 개 장난감을 두고 벌어졌던 비슷한 소송과 판례도 거론했다. 지난 2007년 버지니아 제4항소법원은 당시 루이뷔통이 만드는 비슷한 반려견 전용상품이 1200달러에 달했던 반면, 그 100분의1 가격인 ‘츄이뷔통’은 제품이 헷갈릴 여지가 거의 없는 패러디 상품이라며 판매를 계속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잭 다니엘 측 변호인은 “잭 다니엘도 반려견 모자와 의자 등 전용상품을 만든다. 그런데 VIP의 개 장난감과 가격대가 비슷해 (비슷한 짝퉁으로 여겨지거나 VIP제품에 밀리는)피해를 보고 있다”며 “츄이뷔통 사건과는 경우가 판이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측이 어려운 가운데, 일각에선 대법원이 자료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사건을 항소법원으로 돌려보낼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