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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빨치산의 딸’ 아닌 ‘그냥 정지아’가 말하는 구글·민사고 그리고 자연 속에서 글쓰기[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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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군 간전면 백운산 자락에 든 정지아 집에 이르렀을 때 ‘치타’ 소리가 들렸다. 정지아와 함께 사는 개 치타가 두세 번 짖자 정지아가 마당으로 나왔다. 마루 부엌을 겸해 쓰는, 지리산이 내다보이는 작업실 탁자에 앉자 말했다. “지겨워요. 계속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얘기를 해서요. 속으로 ‘유튜브 강의나 인터뷰 영상을 틀면 되지’ 해요”라며 웃었다. 같은 주제를 두고 이어지는 강연 일정을 두고 한 농담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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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는 “소설은 상처받은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자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낮은 사람들의 존재 이유, 존재의 아름다움을 밝혀주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10일 구례 자택 마당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뒤로 지리산 능선이 보인다. 전남 구례/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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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과 강연 사이 하루 빈 날인 지난 10일 찾아갔다. 지난달 재출간한 단편집 <나의 아름다운 날들>(은행나무)을 읽다가 ‘빨치산의 딸’ 너머 더 깊고 너른 ‘정지아 문학세상’이 언뜻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강연 일정, 내용으로 시작해 구례 살이, 25만 부 판매 소감을 거쳐 소설 속 소수자와 문학정신, 대하소설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돈 벌려고 시작한 ‘어린이 전기’ 작가 시절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같았던 민족사관고등학교 교사 시절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멍 때리면 바람에 관한 문장이 떠오른다


- 강연이 많은데요.

“작년 12월까지 하면 끝날 줄 알았어요. 안 갈 수 없는 게 다 읽고들 오셔요. 직장인들이 두 시간 빼는 게 쉽습니까? 보통 7시 강의면, 밥도 못 먹고 달려오는 건데요. 그런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가야죠. 그런데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웃음).”

- 대부분 <아버지의 해방일지> 관련 강연인데, 구례 매천도서관 아카데미는 글쓰기 기초더군요.

“처음에는 시골 할머니들 인터뷰해서, 전기 써주는 걸 가르쳤어요. 인터뷰부터 해야 하니까 자기 글쓰기는 아닌 거죠. 뜻밖에 시골에도 글 쓰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고 잘들 쓰세요. 자기 글 쓰기는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솔직해지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걸 뛰어넘으면 누구나 자기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 속 선생님은 솔직하신 거 아닌가요.

“다 솔직하지는 않아요. 솔직한 척하는 거죠. 어느 수준까지만 털어놓는 거죠. 사람이 어떻게 바닥까지 솔직하겠습니까. 저라고 연애 안 해봤겠습니까(웃음). 부모님 빼고는 내 얘기를 쓴 게 없어요. 빨치산의 딸이라는, 제 사회적 자아에 관해서는 상당히 솔직하게 드러내지만 또 다른 측면의 개인적 자아는 아직은 못 드러내고 있는 거죠. 스스로 다 해소가 되어야 드러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해야 해요. 내가 그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나 하고요. 그래야 부끄럽지 않고요. 또 나를 용서해야 쓸 수 있어요. 쪽팔려 죽겠으면 못 쓰는 거죠. 쪽팔리는 게 너무 많아 그런 건 못 쓰고 있어요(웃음). 작가로서는 사회적 자아에 관한 글쓰기를 대체적으로는 해결한 셈이죠. 다른 글쓰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를 깨달은 빨치산의 딸···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09021447001


- 구례 쪽 강연이 많은데요.

“안 그래도 매천도서관에서 ‘선생님이 비싸져서 저희 어떻게 합니까’ 걱정해요. 구례는 부르면 갑니다. 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갑니다. 지금 구례에 살고 있고요.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분들이 다 구례 분들이고요. 저도, 제 부모도 그분들의 도움 덕에 산 것이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해야죠.”

- 어느 홈페이지에서 ‘구례의 딸 정지아 작가’라는 표현을 봤어요.

“빨치산의 딸에 이어 구례의 딸… 이제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정지아로만 살고 싶은데(웃음). 막 알아주니까 느닷없어요. 통장에 들어오는 돈은 반가운데, 어디 가서 얼굴 내밀어야 하는 건 좀 괴롭고요(웃음).”

-서울에서 구례로 돌아온 지 12년째인데.

“처음에는 좀 우울했죠. 제가 원래 문단에 잘 안 나갔어요. 아는 작가도 만나는 작가도 별로 없었고요. 그래도 서울에 있으면 문창과(중앙대)니까 이런저런 말도 들리는데, 내려오니까 문단 소식이 깜깜하더라고요. 청탁도 드물어지고요.”

- 뭐하나요. 읽고 쓰는 일만 했나요.

“ 촌구석에서 할 일이 뭐 있겠어요. 그냥 멍 때렸어요. 지나고 나니까 되게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멍 때려도 아무 생각이 없을 수는 없잖아요. 오만 생각이 다 들죠. 바람 불면, 그 움직임을 보고 문장을 떠올리고요. 바람과 관련된 옛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고요. 가장 여유롭게 제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바쁘니까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그래서 힘든가 봐요.”

-멍 때릴 때 메모 같은 건 안 하시는지요.

“글에 관한 건 잘 안 잊어버려요(웃음). 이런 인터뷰 약속은 안 적으면 다 까먹어서 시간까지 다 써놓지만요.”

자연은 우울하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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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집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른다. 전남 구례/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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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집 앞쪽은 지리산, 뒤쪽은 백운산이다. 그 사이 섬진강이 흐른다. 지난 10일 이곳을 찾았을 때 뒷산엔 매화가 피었다. 정지아 단편 ‘검은 방’ 중 지리산을 묘사한 구절이 떠올랐다. “눈이 퍼부을수록 세상은 적막했다. 덮고 있는 눈도 무겁고 적막도 무거운데 마음은 자꾸만 눈송이처럼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라 이 세상이 아닌 우주의 어떤 곳, 삶도 죽음도 뛰어넘은, 어쩌면 삶과 죽음이 시작된 어떤 곳에 닿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의 비의 같은 것의 정수에라도 닿은 듯한 느낌이었다.” ‘애틀랜타 힙스터’는 섬진강 변 벚꽃 축제일 밤의 묘사로 마무리한다. “꽃잎은 여전히 허공을 맴돌다 땅으로 내려앉는다. 연분홍 꽃잎 위로 내려앉은 달빛이 곧 스러질 그것들을 다정히 어루만진다. 숨 막히도록 황홀한 봄밤이다.”

-시도 잘 쓰셨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시로 상도 받고 그랬는데, 대학교 들어가서 첫 시간에 동기가 쓴 거 보고 다시는 시를 안 쓰기로 했어요. 그냥 내가 지금까지 쓴 시는 행갈이한 산문이었구나, 싶더라고요.”

- 늘 자연을 곁에 두고 사시는데요.

“자연, 좋아하죠. 멍 때리는 것도, 한적해야 해요. 멍 때리면 계절이 변화하는 게 보여요. 꽃이든 산이든 가장 예쁠 때가 있거든요. 산은 4월 중순이 제일 예뻐요. 아래에서부터 색깔이 달라져요. 연두색이 조금씩 짙어져요. 산을 타고 봄이 올라가는 게 느껴지거든요. 연한 노란빛 감나무 어린잎이 정말 예뻐요. 아이들 발 만지는 느낌 있잖아요. 땅을 한 번도 딛지 않은, 그 말랑말랑하고 순수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있는데, 봄에 피는 이파리들이 그렇거든요. 근데 순식간에 짙어져요. 순식간에 세파에 시달린 어른처럼 색깔에 때가 묻는 거죠. 초록이 짙어지면서. 굳이 화무십일홍 같은 말을 배우지 않아도 젊으면 시들기 마련이라는 걸 그냥 배우는 거죠.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우울증이 없어요. 자연은 우울하지 않죠. 때가 되면 변하고 잎을 떨굴 뿐이죠.”

- 집이 산속인 데다 어머니랑만 사는데, 외롭진 않으신가요.

“사람 속에 살면서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할 때 스트레스가 쌓이고 외로운 거죠. 상추 하나 키워도 나날이 달라져요. 내가 물 주면 이만큼 크고, 며칠 되면 따 먹을 만하게 되어 있고요. 그런 거 지켜보면 고립된 존재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거죠. 자연에 대한 대단히 심오한 뭔가를 가진 건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자연에서 컸고요. 서울 살 때도 주로 산 밑에서 살았어요. 대학원 다닐 때는 북한산 밑이나 불암산 밑에 찾아갔죠. 집은 그저 그래도 되는데, 산이 있어야 숨이 쉬어져요.”

-적적하면 술 드시는 분들 많은데, ‘혼술’은 하시나요.

“요즘 계속 저녁 7시 강연이에요. 운전해서 오면, 지치죠. 저는 좀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생기는 사람인가 봐요. 원래 위스키 좋아하는데 요즘은 소주 먹어요. 맛대가리가 없어서 아무 때나 멈출 수 있어서요(웃음). 혼술을 하는 이유가, 바깥에서는 아무래도 약간의 가식과 위선이 있을 수밖에 없죠. 본래의 나로 되돌리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 시간에는 소주가 유일한 친구네요.”

- 여기가 옛날 살던 곳인가요.

“다른 데죠. 고향 마을에는 친척들이 살아요. 거기 들어가면 시어머니 10명과 사는 것과 똑같아(웃음). 시골 노인네들에겐 제 삶의 태도가 영 못마땅하죠. 엄마 모신 뒤로 처음엔 오전 10시, 11시에 일어나고 그랬어요. 서울 사는 소설가들은 다 그럴걸요. 새벽 4시 5시에 자는데, 이것도 시골 어른들이 보면 이해 못 할 일이고요.”

- 시골 사는 건 어떤가요.

“(한 강연에서 시골 살며 좋은 점을 말했더니) 어느 분이 구례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는 가능한데, 서울 사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요. 제가 법륜 스님은 알지 않을까 싶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고, 이런 얘기를 해요. 관계도 전염성이 있어요. 제가 구례 내려와서 부모님들의 사랑 덕분에 사랑을 배우고, 주고받는 법을 좀 배웠거든요. 촌사람들이 안 좋은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인심이 좋아요. 인심을 안 쓰면 작물을 처리할 수가 없거든요. 이를테면 호박이 내가 먹을 만큼 사나흘에 하나씩만 열리면 좋잖아요? 열릴 땐 열 개가 열리고 안 열릴 땐 하나도 안 열려요. 우리 집 많이 열리면 옆집하고 나눠 먹고, 옆집 많이 열리면 또 나눠 먹고요. 그거 쌓아두면 뭐 할 거예요. 상추도 크기 시작하면 미친 듯이 커요. 자꾸 따줘야 새로 먹을 수가 있거든요.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마다 다 따줘요. 손님들은 그걸 모르고 내가 인심이 좋은 줄 아는데(웃음), 사실은 처리해야 하는 거예요. 서울에서는 지금 여기 내려오는 친구들과도 남들과 똑같은 그냥 냉정한 관계였거든요. 좋아는 하지만 주고받는 거 없는 그런 관계요. 내가 친구들 갈 때 뭘 챙겨주니까, 올 때 서울에서 뭘 사서 와요. 자본주의 사회의 관계 전체를 어떻게 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만, 내가 조금 달라지고, 그 영향으로 친구가 조금 달라지고,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로서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이거든요.”

-아드님은 서울에 있나요.

“지금 카투샤인데 4월 초에 제대해요. 3박 4일 와 있으면 가라고 해요. 2박 3일이 딱 좋아요(웃음).”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서울로 가신 거죠.

“연신내 전셋집 살다가 쫓겨나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경찰이 (아버지 일로) 드나드니까요”.

- 서울로 다시 갈 생각은 없나요.

“서울은 답답해요. 서울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아요. 집을 구하는 것부터가 경쟁이고요. 돈을 벌어도 서울에 집을 못 사고요.”

구글애플, 그냥저냥 삽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테이블 위로 튀어 올라와 노트북 자판에 앉았다. 애플이다. 애플이 노트북을 떠나자 다른 고양이 저냥이가 자리를 차지한다. 개 두 마리도 키운다. 엄마인 호랑이와 딸 치타다. 저냥이는 사람, 동물 통틀어 이 집의 유일한 수컷이다.

- 애플과 구글이라고요.

“좀 밝아진 거죠. 인생 마인드를 바꿔야 하겠다,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 자본주의를 사랑하고 열심히 돈을 벌기로 했다 같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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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는 개, 고양이와 함께 산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애플, 저냥, 치타. 전남 구례/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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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고양이를 언제부터 키웠나요.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기본적으로 외로워야 좀 힘이 나는 사람이었는데, 처음 내려왔을 때 너무 외로워서 제자한테 ‘요즘 인생이 좀 쓸쓸하네’ 이랬더니, 다음 날 그냥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내려왔어요. 그래서 이름을 그냥이라 지었어요(웃음). 새끼를 키워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저냥이를 구해줬어요. 구글과 애플이는 새끼들이에요. 그냥이는 지 새끼 나올 때 양막도 안 찢고, 탯줄도 안 자르고 해서 내가 다 해줬어요. 지 아플 때만 나한테 기대요. 지금 닭고기 달라고 하는 거예요. 먹을 위치도 지가 정해요.”

-개들 산책은요.

“바빠지기 전에는 매일 산책을 시켰죠. 산으로 돌면 1시간 20분 정도 해요.”

-산책하며 영감을 얻는 작가들이 많은데요.

“우리 호랑이는 풀려나는 순간 닭을 잡아요. 산책할 때는, 남들한테 피해 주면 안 되니까 애들한테 집중하느라 글감 같은 건 잘 생각이 안 나고요. 집에서 멍 때리는 게 제일 좋더라고요.”

‘악마는 없다, 왜 저럴까’를 고민할 뿐


- <나의 아름다운 날들> 표제작은 친일 지주 집안을 다루는데, 악마화하지 않았더군요.

“그들이 악마겠어요? 자기 틀 안에서 살아왔을 뿐이죠. 소설 속 김 여사를 생각하게 해준 강남 할매를 만난 적 있어요. 부잣집 딸이었데요.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 사는 영광으로 피난을 왔대요. 이야기를 듣다가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한테 은혜 입은 사람이 자기가 먹어본 것 중 제일 형편없는 음식을 줬다는 거예요. ‘머리 검은 짐승은 역시 거두는 게 아니다’라면서. 그 음식이 귀한 굴비예요. 나쁜 분이 아니에요. 옆에 있는 사람한테는 마음도 쓸 줄 아는 분이에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가 아니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아왔으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삶이 과연 아름다운가요? ‘나의 삶은 아름다웠다’고 여기는 건 고생을 안 해봤기 때문이죠. 또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모르는 거거든요. 그래서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과연 아름다운 것인가를 소설에서 풍자한 거죠. ‘빨치산의 딸’ 때문에 이미지가 그래서 그런데 제 소설 중에 막 그렇게 좌파적이고 이런 거 잘 없어요(웃음).”

-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특정 진영 쪽 분들이 많이 추천했습니다. 이 책이나 <나의 아름다운 날들>, <자본주의의 적>(2021)은 진영에 갇히지 않은 듯한데요.

“인간적인 느낌일 겁니다. 우리가 이념 하면, 베트남 하면 뭐 어쩌고 하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묘사한, 베트남 참전 용사를 어떻게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왜 알코올 중독이고, 어떻게 다리를 잃었는지는 몰라요. 어떤 분노가 쌓여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삶에 뭔가가 있으니까 장례식장에 와서 ‘빨갱이 새끼가 죽었으면 박수를 쳐야지’라고 말할 수 있는 거겠죠. ‘저 사람은 나빠’가 아니라 ‘저 사람은 왜 그럴까’를 고민하면서 스토리를 만든 거죠. 친한 친구들이 정치 갖고 싸워요. 선거할 때 찍는 사람은 다른데, 상식을 가지고 인간에 관해 얘기할 때 잘 맞거든요. 그러면 되는 거지.”

-<자본주의의 적> 중 ‘애틀랜타 힙스터’에 나오는 카페는 실제로 있나요.

“지금은 문 닫았을 거예요. 자리는 남아 있고요. 그 카페에 원어민 강사들이 맨날 모인 것만 사실이에요. 이 조그마한 동네에 초중고 원어민 강사가 한 30명쯤 된다고 하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어떤 애들이 왜 이런 데까지 와서 월급도 아마 얼마 안 될 텐데 왜 그러고 있을까’ 이런 고민하고 상상해봤어요. (소설은) 그 결과물이죠. 제 얘기는 없어요. 일상에서 포착한 소재를 그럴듯하게 그냥 만들어내는 게 소설인 거죠,”

- 여러 단편에 이주민들이 나오는데요. <나의 아름다운 날들> 중 ‘핏줄’에선 한산 이씨 27대 종손을 외국인과 결혼시킨 집안 이야기인데요.

“여긴 한 20년쯤 전부터 이주민 여성들이 들어온 것 같아요. 제가 친하게 지내거나 잘 아는 이주민은 없어요. ‘누구 집 며느리가 어떻더라’ 같은 시골 어른들 소문만 듣죠. 어떻게 보면 농민들이 가장 보수적이죠. 그 보수적인 사람들이 어쨌건 외국인과 피를 섞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건데, 이런 고민을 하다 쓴 거죠. 여기도 마트나 식당 젊은 여자는 대부분 이주민이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그들의 아이에요. 그런데 20년쯤 여기 산 이들도 아직 확 섞이질 못해요. 시골뿐만이 아닐 것 같은데요. 한국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것 같아요. 그분들이 한국 사람들 대할 때랑 자기들끼리 놀 때랑 표정이 달라요. 어느 날 마트에서 누가 막 시끄럽게 떠들어서 봤더니 늘 말 없고 얌전하던 양반이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랑 전혀 다른 톤으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떠들고 있더라고요. 저 사람은 한국 집에 돌아가면 늘 자기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조금 안 좋았는데 그런 얘기도 언젠가는 나올 수 있겠죠.”

돈 별려고 쓴 어린이, 청소년 전기


애플 하니 <도전과 창조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자음과 모음)가 떠올랐다. 정지아가 쓴 청소년 평전이다. 정지아 출간 책을 대형서점 사이트에서 오래된 순으로 검색하면, <콜럼버스>(삼성출판사)가 가장 먼저 뜬다. ‘삼성 어린이 세계 위인’ 1권이다.어린이 동화와 전기에 역사책까지 21권이 나온다. 성인용 전기까지 포함하면 24권이다.

- 2001년부터 어린이 전기를 쓰셨던데요.

“<빨치산의 딸>을 쓰고는, 소설로는 돈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대신 어린이 전기는 엄청나게 썼죠. 돈 벌려고요(웃음). 애들 책이 엄청 많이 나갈 때가 있었어요. 출판사에서 세계 명작 시리즈나 위인전 시리즈를 다시 만들고 이럴 때가 있었죠. 그때 저한테도 일거리가 왔어요. 하나를 했더니 ‘잘하네’ 해서 계속했어요. 써 달라는 건 다 했어요.”

-2020년엔 ‘재미만만 한국사 시리즈’ 중 <매력 만점 고려 문화>도 냈고요.

“그것도 돈 벌려고요(웃음). 이 집을 고쳐야 하는데, 돈이 없었어요. 한 1000만원 들여서 다 고쳤어요. 이런 책이 돈이 됩니다. 그거 벌써 10쇄인가 그래요. 끊임없이 팔려요.”

- <춘향전>(창비, 2005) 보도자료를 보니, 춘향의 당당한 자기주장이나 방자의 양반에 대한 조롱 같은 여성과 민중 시각을 강조했다고 나오는데요.

“그걸 좀 살렸어요. 다만, 이거는 판본을 벗어나면 안 돼요. 대신 몇 개 판본을 토대로 섞을 수는 있어요. 여성주의 시각을 섞은 거죠. 이 시대엔 그게 더 바르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문장이에요. 정말 잘 썼어요(웃음). 문장에 심혈을 기울였거든요. 판본을 압축하면서 운율을 맞췄어요. 쓰다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저도 줄거리만 알았지 판소리를 듣지도, 판본을 읽어보지도 않았거든요. 판본을 보니까 그 말들이 정말 살아있는 입말들이에요. 거의 다 살렸어요. 그래서 문장이 좋아요. 근데 아무도 그 얘기는 안 해(웃음). 가끔 아이들 거 쓸 때도 제가 꽂히면 잘 쓰기도 했어요.”

정지아는 ‘별춘향전’ 계통의 ‘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를 주 대본으로 ‘남원고사’ 계통의 ‘파리 동양어학교본 남원고사’, ‘경판 30장본’, ‘고대본’과 이해조 신소설 <옥중화>(1912) 등을 참조했다.

- 힘든 점은 없었나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일이 축약하는 일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쉬워요. 요약정리의 달인 같아요(웃음). 다른 작가들 작업을 봤더니, 사건들은 다 두고 묘사를 줄이는 식으로 하더라고요. 이러면 골치 아파요. 저는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나 인물을 다 쳐내요. 주제를 담고 있는 인물과 사건만 딱 남겨요. 그러면 주제가 더 잘 살아나요. 이렇게 하루 원고지 400매씩 쓰고 했어요.”

- 전기 작법과 소설 작법이 서로 영향을 주나요.

“일단 요약은 도움이 되고요. 노구치 같은, 내가 관심 있는 사람들은 소설로도 다 흡수가 되죠. 콜럼버스도 재미있어요. 어쨌건 근대를 열어젖힌 사람이잖아요. 재밌으니까 공부가 돼요. 제일 재미없는 게 옛날 위인들이에요. 슈바이처나 갈릴레오 같은 학자들은 재미없어요(웃음). 인간들이 맨날 공부만 하고 기도만 해요. 읽다가 지겨워지죠. 우리나라 위인전이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인들이 전기처럼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을 리 없어요. 그런 책만 읽고 자라면 사람들이 위선적으로 돼요. 위인들은 다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런 거죠. 인간적인 약점과 결함을 뚫고 일어나서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되는 건데, 너무 미화되면서 재미가 없어요.”

- 송건호 선생을 다룬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도 쓰셨는데.

“송건호 선생 좋아해요. 재미는 없어요. 그래도 아름다운 사람이라서 꽤 공을 들여서 썼어요.”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서 본 사람, 권정생


-전기 중에 좋았던 작품은요.

“그 중 딱 좋았던 거는 권정생과 노구치 히데요 두 사람이에요. 히데요가 좋았던 건 틀에 박힌 천재가 아니에요. 자기 한계도 매우 많은데, 그 한계를 유감없이 드러냈어요. 너무 가난하게 커서 돈 개념이 없어요. 후원자를 등쳐먹기도 해요(웃음). 그런데 연구는 정말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자였어요. 이 사람 약점이 매력적이라, 그걸 쓰게 해달라는 조건을 걸었어요. 그 외에는 다 돈 벌려고, 별짓 다 했죠(웃음).”

-권 선생은 어떤 면을 좋아하시나요.

“거지로 살아본 사람이잖아요. 폐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정말 운 좋게 살아남았어요. 동생이 결혼하는데 폐병쟁이가 집에 있으면 안 들어오려고 할 테니 아버지가 집을 나가라고 해요. 집 나가서 죽으라는 얘기죠. 폐가 되면 안 되겠구나, 동생이 대를 이어야 하니까 하고 집을 나와서 정말 거지로 살거든요.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서본 사람이죠. 그러면 이 더러운 세상, 하고 탓하는 게 정상인데 이 사람은 그 누구도 무엇도 원망하지 않아요. 자기에게 주어진 그 처절한 상황을 그냥 받아들여요. 밑바닥을 살면서 가장 낮은 곳을 사랑하는 거죠. 낮은 곳으로부터 사랑이 시작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예수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지아는 유서를 보고 감동한 뒤 권정생 글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이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그는 유서 첫 구절 권정생이 어떤 목사를 두고 한 말을 인용한 뒤 말을 이어갔다.

“이 목사가 착하니까 저작권을 믿고 맡기는데, 오줌 눈 게 늘 마음에 걸렸던 거예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사람을 이렇게까지 보는 사람이구나 하고요. ‘저 사람은 사람에게는 착하지만 거미는 짓밟아 죽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니까 안 보는 걸 권 선생은 유심히 보는 거죠. 전 이런 분들이 좋아요. 진주의 진짜 어른 김장하 같은 분도요. 그런 사람들이 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권 선생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거나 한 적은 없나요.

“책을 보고 좋으면 좋은 거죠. 만나서 뭐 하겠어요(웃음). 이문구 선생도 아주 좋아하지만 한번 찾아간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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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가 쓴 권정생과 노구치 어린이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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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글 보니, 대학 은사님도 존경하는 분 같은데요.

“1970년대는 꽤 진보적인 작가로 유명했던 신상웅 소설가신데요. 학교 오신 뒤로는 거의 소설을 안 쓰셔서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거예요. 존경하는 이유는 많지만, 선생님은 아직도 성장하고 변화하는 분이세요. 선생님이 원래 소주를 원샷을 하세요. 안 친한 사람들하고는 몇 병을 먹어도 안 취해요. 그런데 저희랑 먹으면 1시간 만에 취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선생님 뵈러 구례에서 올라왔는데 한 시간 만에 취하시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선생님이 알았다면서 투 샷을 하시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스리 샷을 하시고요. 이게 (술 많이 먹는 사람한테, 그리고 나이 든 사람에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자들한테 폐 안 끼치고 신세 안 지려고 여든 넘어서도 노력하시는 거죠. 타인을 위해서 배려하는 것이고. 문학 정신이라는 것을 저한테 알려주신 분이죠. 정말 정통적 리얼리스트이신데, 시대를 떠나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려주셨죠. ‘작가가 시대를 떠나서는 안 된다, 작가라고 별거 아니다, 삶이 우선이다’라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저도 문학은 삶 속에 있어야 하고, 문학적 상상력은 삶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친구들끼리 웃으면서 얘기하거든요. 출퇴근의 고통도 모르는 것들이 소설을 쓰면 안 된다고. 저도 그중 하나긴 하지만요.”

<죽은 시인의 사회> 같았던 민사고 시절


정지아가 어린이 전기를 쓴 이유 하나는 민사고 퇴직이다. 1999년 민족사관고등학교에서 10개월가량 문예반 교사로 ‘짧고 굵게’ 일했다. 대학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친 정지아가 ‘우리 제자가’라고 할 땐, 주로 민사고 제자를 가리킨다. 그는 민사고 졸업생 10여 명과 “지금도 너무 친하다”고 했다. 그는 전기를 쓰듯 ‘한계와 약점’도 이야기했다.

- 언제 가르치셨나요.

“1999년에 10개월 정도 가르쳤어요. 최명재 이사장이 제일 좋아하는 게 노벨상하고 올림픽이래요. 민사고 만들 때 노벨 문학상도 있는 걸 처음 알았대요. 그래서 문학 선생을 뽑으라고 한 거죠. 그때 1학년이 60명 정도밖에 안 됐는데, 문예반에 다 들어오려고 했어요. 고등학생 가르친 건 처음인데, 애들이 너무 똑똑하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고 그랬어요. 하나를 가르치면 두 개가 달라져서 와요. 저도 열심히 했죠. 밤새워서 애들 글 새빨갛게 첨삭해주고, 글이 달라지니까 너무 재밌더라고요. 학교 밖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오니까 이사장이 나를 건드리지 않았어요.”

- 건드리지 않았다니요.

“저를 못마땅해 했어요. 말을 안 듣고 하니까요. 이를테면, 어느 날 갑자기 전 과목 강의를 영어로 한다면서,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가르치라는 거예요. 선생님들도 매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해요. 테스트도 하고요. 얼마나 괴로워요. 퇴근이 2~3시간이 늦어지는 건데. 내가 토익이든 토플이든 시험을 보게 하고, 점수를 못 올릴 경우 불이익을 주면 스스로 공부하지 않겠냐고 했어요. 놀부 모자(정자관, 程子冠)도 너무 싫었어요. 머리가 아프고, 자꾸 벗겨져서 그냥 안 쓰고 다녔어요. 지나고 보면 최 이사장이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돈을 한 푼도 학교에서 빼가지 않았어요. 오히려 파스퇴르가 이 학교 때문에 망했죠. 지금은 학비가 비싼 학교인데, 그때는 거의 공짜였다가 설립 4년 차부터 파스퇴르가 어려워지면서 월 60만 원씩 받았어요. 기숙사비, 학원비 같은 걸 생각하면 아주 비싼 건 아니죠. 돈도 정말 많이 줬어요. 그 시절에 제가 아무 경력 없이 석사 학위만 있었는데 월 300만 원 넘게 받았어요. 원주에 18평짜리 아파트도 무료로 살게 해줘요. 그리고 밥 하루 세끼 다 주고. 연봉 1억 넘는 선생님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러니까 파스퇴르가 망한 거예요. 최 이사장이 제가 애들한테 인기가 좋으니까 내버려 둔 거죠. 한 달에 한 번은 유명 작가 초청 강연도 하고 정말 좋았어요. 학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도 해줬고요. 한 달에 한두 번씩 애들하고 놀러 다녔어요. 강릉에 1박 2일 놀러도 가고요. 월급 받으면 그걸로 애들 밥 사 먹이고 고기 사 먹이고(웃음). 애들이 저 갑부인 줄 알았대요. ”

- 관두신 건가요, 해고당한 건가요.

“제가 너무 싫어했던 거는 형식주의예요. 매일 조회를 해요. 애국가 4절까지 부르고요. 다음엔 영어 교가를 부르고요. 최 이사장은 나중 보니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조금 있었더라고요. 돈이 뭐든 현실로 만들어 주니까 그 문제를 몰랐던 거예요. 자본의 힘 같은 걸 느끼게 해주는 사례죠. 조회 때 어떤 날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했다가, 다음날은 천황 폐하한테 상을 받은 사람이야 이러고요. 1학기에 조회 안 나갔는데, 2학기에 간 날 그러길래, 피식거리다가 찍힌 거죠. 일단 경제적 이유로 여기 한 2~3년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이 생각을 했어요. 애들도 좋았고, 가르치는 것도 정말 좋았고요. 그래도 애국가를 차마 부르지 못하겠더라고요. 이사장은 맨날 기 싸움을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여기서 꼬리를 내리면 더 막 대할 건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지금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나겠다 싶었죠.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요. 이유 불문 애국가를 부르래요. 어디 외국 나가서 들으면 가슴 뭉클하지만, 여기서 애국가가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었죠. 그것도 매일. 다음 날 내가 편지를 써서 줬어요. 당신의 민족 교육, 창의 교육은 한국 교육계에 위대한 혁신이라 생각하지만 애국가를 매일 4절까지 부르는 건 너무 형식주의다, 이 형식주의만 개선하면 이 학교가 얼마나 좋을 것인가를 A4 네 장으로 썼어요. 그걸 보고 이사장이 ‘공산당이야? 뭔 말이 이렇게 많아!’ 이러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내가 아직 사면이 안 됐을 때라. 절 편견 없이 뽑은 건 맞아요. 내가 조금 비위만 맞췄으면 괜찮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당장 나가래요.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는데, 애들이 선생님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마지막 인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이사장 바짓가랑이 붙들고 막 울고, (이사장은) 그런 애 발로 걷어차고. 완전 <죽은 시인의 사회>였죠(웃음). 그때 아이들과 지금도 친해요. 이제 24년째네요.”

소설은 가장 낮은 사람들의 존재 이유와 아름다움을 밝혀주는 것


정지아는 민사고를 나온 뒤 어린이 전기 등을 쓰면서, 소설도 일 년에 단편 한두 편씩은 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고요. 많이 써야 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비슷한 스타일의 비슷한 톤, 비슷한 수준의 글을 쓰는 건 의미도 없고, 지겹기도 하고요. 어떤 고비를 뛰어넘을 때, 삶에 관해 뭔가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때 쓰면 되는 거로 생각했어요.”

- 세계일보 연재 칼럼 보니,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잘 팔려서 파리에 사는 후배 한국행 비행기표 사주고, 그 후배가 20만 부 돌파하면 터뜨리라고 샴페인을 선물을 사 왔다고 쓰셨는데요. 지금 얼마 정도 팔렸습니까.

“25만 부 돌파했습니다. 끝날 때가 된 것 같았는데 계속 책이 나가네요.”

- 예전 자조적으로 ‘1만 부 작가’라고 하셨는데, ‘25만 부 작가’ 소감은요.

“팔린다고 잘 쓴 소설이 아니고 안 팔린다고 못 쓴 소설이 아니죠. 나도 그랬지만 안 팔리는 소설 중에 좋은 것들이 많아요. 독자들이 혜안을 가지고 그런 책을 알아봐준다면 작가들이 참 행복할 거 같아요.”

- 후속작 부담도 좀 크시겠어요.

“(잘 팔리고) 맨 처음에는 그랬는데요. 지금은 고민 안 하려고요. 쓰고 싶은 거 쓰면서 계속 잘 되면 더 좋겠지만 지금 이것만 해도 얼마나 좋아요.”

- 독자 댓글을 읽고 2년 동안 고민했다고 하셨는데요.

“한 독자가 어느 소설가 작품을 두고, ‘논리도 없고 주제는 뭔지도 모르겠다’고 쓴 거에요. 제 글이 뭔지는 까먹었는데, ‘한 문장 한 문장 허투루 된 데가 없고 밀도가 높다’며 엄청난 칭찬을 했어요. 뿌듯한 마음으로 읽는데, 맨 마지막에 근데 ‘왜 아까 (혹평한) 그 소설을 다시 읽고 싶지’ 이렇게 써놓은 거예요. 왜 이럴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죠. 저는 밀도가 높아야 좋은 소설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도 사람하고 소통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이 내 글을 보면 굉장히 불편하고, 긴장했겠구나 하는… 저를 좀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 독자들이 있으니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가능했던 거죠.”

- 노숙자, 장애인, 이주민 등 소수자나 약자를 다룬 소설이 많은데요.

“소수자를 위해서 써야겠다, 이런 거는 없어요. 이 시대가 원하는 글, 예를 들어 페미니즘적인 글을 써야지, 이런 생각도 없고요. 그냥 제가 이해한 만큼 쓰는 거죠. 기본적으로 제가 (빨갱이의 딸이라는) 소수자 아니었겠습니까. 제가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사람들이 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죠. 그냥 그런 사람들이 더 눈에 밟혀요. 그다음 또 하나는 잘 나가는 사람들을 굳이 소설에 쓸 이유가 없어요. 단편 ‘나의 아름다운 날들’의 김 여사가 유일하죠. 소설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처받은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 틀과 시스템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박수 쳐주는 게 문학은 아닌 거죠. 권정생의 자세 같은 것이 문학의 자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낮은 사람들의 존재 이유, 존재의 아름다움을 밝혀주는 그런 게 소설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 선생님 소설에도 얽히고설킨, 질기고 질긴 인연, 관계들이 이어지는데요.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사는 거잖아요. 신자유주의하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사실은 관계랄 게 없어요. 부모 자식, 부부, 연인 정도가 진짜 관계이고, 대부분은 페북으로 교류하거나 동호회 통해 만나는 건데요. 이거 다 제가 밖에 나가서 착한 척하고 사진 찍는 거랑 똑같거든요. 어떤 건 과장이고, 어떤 건 허세겠죠. 진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팔로워가 수천, 수만이 되어도 실제 자기와는 괴리가 있죠. 그래서 인정받아 봤자 외로움이 덜어지질 않아요. 시골은 동네가 좁으니까 다 알아요. 어떻게든 다 알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는 명품 가방을 누가 들고 나가잖아요. 일단은 명품인지 뭔지 아무도 몰라요. 두 번째는 안다고 해도요 ‘아이고 자가 월급이 한 200 된다는디 뭔 돈이 있어서 저걸 샀을까, 저러다가 큰일 나겄네’ 이렇게 나와요. 속아주질 않아요. 그래서 시골에 살면 훨씬 건강하고요. 잘 보이려고 해봤자 ‘자가 지금 엄마 빚이 얼만디’ 이렇게 나오니까, 어떤 관계이든 힘들든 쉽든, 좋든 나쁘든 정면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는 그렇죠. 대도시에서는 바깥의 관계는 허위가 많아, 훨씬 더 외롭죠. 그런데도 인간이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이유는 관계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고요.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하에서는 금융자본이라는 것이 사람을 정말 고독하게 만든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옛날에 삼성을 이병철이 다 휘어잡고 있을 때는 사람을 함부로 못 잘라요. 누가 실수를 좀 해도 개국 공신이야, 힘들 때부터 나랑 같이 일을 했어, 잘랐으면 딱 좋겠는데 몇십 년 같이 일해 왔던 놈을, 아들 막 대학생 됐는데, 어떻게 자르겠어요. 자본가가 전체를 독점하고, 자기 회사를 점유하던 시대에는 평생직장 개념이 가능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삼성도 삼성 게 아니잖아요. 다국적 펀드가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그 펀드는 가혹할 수 있는 거예요. 얼굴이 없어요. 저 펀드에서 요구하면 개국공신이어도 자를 수밖에 없고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내 삶을 비탄에 빠뜨리는 존재를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관계 속에서 알고 싸워야 하는 대상이 사라진 거죠. 주식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그런 식으로 파괴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또 주식에 열광해요. 그것밖에는 올라갈 기회가 없으니까. 펀드란 무수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돈이 모인 거죠. 금융자본의 정체를 알 수 없고, 이런 사회 속에서 나 자신도 알 수 없고, 진짜 관계도 없어요. 이런 것들이 사람을 굉장히 외롭게 만든다고 생각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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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집 바로 앞은 텃밭이다. 밭을 일구고, 사계의 변화를 보면 고립된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전남구례/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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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중 “‘아야, 야멸차게 글지 마라. 사는 거이 다 맘대로 된다디야? 니는 살아봉게 다 니 맘대로 되디야? 그랬으먼 니는 이혼을 왜 했냐? 촌구석으로는 왜 기어들어왔냐?” 같은 삶에 관한 여러 대사도 인상적입니다. 사는 게 어떤 겁니까.

“법륜스님에게 물어야 할 말을 왜 나한테 물어요?(웃음). 제 머릿속에서 나온 말들도 있지만 그런 말의 상당수는 누군가가 한 말이에요. 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말들이에요. 장터 할매가 문득 던진 말을 들으면 저런 게 문학이다 싶죠. 인생을 덜 산 내 머리로는 안 나오는 말이죠. 사실 70이든 80이든 한 생을 살아낸 사람들의 삶은 그대로 다 소설이에요. 본인들이 언어로 옮길 재주가 없고, 그중 멋진 것을 뽑아낼 재주가 없는 것일 뿐이죠. 작가는 그걸 뽑아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고요. 전 이렇게 지나치는 말을 잘 잡아내는 것 같아요. 재주도 글 잘 쓰는 것밖에 없고요(웃음). 사람마다 잘하는 게 있는 거잖아요. 저는 진짜 딴 걸 못 해요. 살림도 잘 못 하고.”

- 선생님 소설은 리얼리즘인가요.

“사람들이 자꾸 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사실 리얼리즘이 아닌 작품들도 많아요. 근데 뭐 저는 문학 이론을 별로 안 좋아해요. 이론은 언제나 삶을 평면화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삶의 전부를 이론화할 수는 없는 거죠. 문학 이론보다 더 생생한 것이 작품인데, 정말로 잘 쓴 작품은 평론이 별로 없어요. 이문구 작품이 그래요. 몇 안 되는 평론도 이문구 작품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요. 이문구는 반독재 투쟁에도 앞장섰던 사람인데, 농촌 사회를 그렸다고 봉건적이라고 평들을 해요. 자꾸 이론을 들이대서 이 작품을 보려고 하니까 그런 오류가 생겨나는 것이죠.”

김운경의 ‘옥이이모’ 같은 소설 쓰고 싶었다


- 이문구 작가 작품이 어떤지요.

“박경리 소설의 악인은 영원한 악인이에요. 착한 사람은 맨날 억압당하면서도 끝까지 착해요. 평면적 캐릭터인 거죠. 그런데 이문구는 인간을 가장 입체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그려낸 사람이에요. 예를 들면 <관촌수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입체적이에요. 도둑질했다고 한 인간을 나쁜 놈으로만 묘사하는 게 아니라, 선함도 입체적으로 그려내면서, 그 선한 시절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보여주거든요. 화자인 이문구 아버지 때문에 빨갱이 물이 든 석공(신현석)이 있잖아요. 그 아버지가 꿈꾸던 게 아마도 평등한 세상이었겠죠. 유학자 집안 출신 아버지가 석공이 장가가던 날 그 집에서 술 먹고 취해 춤을 춰요. 평생 천것으로 설움 받고 살아온 석공은 그 순간 이 사람을 신으로 받드는 거예요. 그 순간 평생 한이 다 풀리는 거죠. 이문구 아버지가 어느 날 경찰서에 갇히니까 석공이 막 뛰어가요. 도시락을 갖다주려는데 식을까 봐 그런 거예요. 그 대목 읽으면서 울었어요. 자기를 사람으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은 거죠. 그런 마음이 제 소설에 나오는 떡집 언니의 마음과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고, 그것을 아름답게 그려낼 줄 아는 이문구의 소설이 너무 좋아요.”

- 또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요.

“전 김운경 작가의 <옥이 이모> 같은 소설을 쓰는 게 꿈이었어요. 가난한 시골 농민들에 우스꽝스러운 경찰과 창녀들의 순정 등등 이런 것이 리얼이다, 예술이란 건 저래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찰리 채플린 영화도 되게 좋아했어요. <모던타임즈> 만큼 자본주의의 핵심을 건드린 작품은 그 이후에도 없다고 생각해요. 밥 먹으러 갈 때도 손을 멈추지 못하거나 컨베이어 벨트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이런 장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가를 보여주죠. 그 어떤 소설도 채플린 작품처럼 해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드라마 이야기를 계속하면, 어떤 드라마들은 요즘 한국 소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미생> 같은 드라마도 굉장히 좋았고요. <나의 아저씨> 같은 드라마도 감동적으로 봤어요. 둘 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루잖아요. 문학 하는 사람들의 자의식 이런 거 말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소설은 그걸 못하는데, 드라마는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동백꽃 필 무렵> 같은 드라마도, 맨 뒤에 신파적으로 가긴 했지만, 현실 캐릭터를 그려내는 힘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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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은 백운산 자락이다. 지난 10일엔 매화가 활짝 피었다. 정지아는 뒷산 텃밭에서 두릅 등도 길러 나눠 먹는다. 전남구례/김종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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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세에는 대하소설 쓰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옛날부터 쓰고 싶었어요. 현재 자본주의까지는 제가 감당을 못할 것 같고요. 지금 금융 자본주의는 이해를 잘 못 하겠어요. 펀드 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물어봤는데 답이 없더만요. 걔들도 망했다고 생각한대요. 생산이 중요했던 초창기 자본주의 정도는 다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정도 때까지는 써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데올로기 문제도 나올 수밖에 없겠죠.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더 많이 이야기하지만 이데올로기 투쟁도 자본주의 이식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거든요. 이데올로기의 근원은 경제구조예요. 우리가 어떻게 일본과 미국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 어떤 고통을 겪었는가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역시 재미는 없을…(웃음).”

오후 3시 시작한 인터뷰가 오후 5시 30분을 넘어갔다. 정지아는 밥을 안치고, 찬을 준비했다. 어머니 이옥남 식사다.

- 삼시 세끼를 계속 챙겨주시나요.

“하루 두 끼 드세요. 제가 서울 같은 데 갈 때는 미리미리 좀 해놓죠. 엄마가 데워 드실 수는 있으니까요. 요즘은 건강도 괜찮으세요. 제가 어머니 밥을 먹고 자랐잖아요. 공짜는 없고 갚아야 합니다(웃음). 자식들은 갚으면서 생색이라도 내죠.”

정지아는 며칠 뒤 “구례에서 신문 구하기가 힘들다”며 e메일을 보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신문 한 부만 집으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엄마가 저 나온 신문을 보시면 며칠 즐거워하십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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