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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여권 노골적 압박’ 윤경림도 KT 대표후보 사퇴 수순···“예전에 통신공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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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윤경림 KT 대표이사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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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림 KT 대표이사 후보가 전방위적인 여권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내정 16일 만에 사퇴 수순을 밟게 됐다. “정부의 우려를 충분히 공감하고, 적극 소통하고 맞춰나가겠다”던 윤 후보의 포부는 공수표가 됐다. 앞서 연임 확정 후 국민연금과 여권의 반대에 중도 포기한 구현모 현 대표에 연이은 사퇴다. 이달 말 구 대표의 임기가 만료되는 상황에서 KT는 사상 초유의 경영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됐다.

국내외 주주의결권 자문기관들이 일제히 윤 후보에 대한 찬성표까지 권고했으나, 2002년 공식 민영화된 KT가 여전히 정치권의 외풍에 취약한 모습을 재확인한 것이다.

윤경림 정조준한 여권의 전방위 압박


23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윤 후보는 전날 KT 이사진과 가진 간담회 등을 통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버티면 KT가 더 망가질 것 같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규제산업인 통신사업 특성상 정부와 척을 지기 어렵다고 판단해 백기를 든 모습이다.

이사진은 윤 후보에게 “회사를 생각해야 한다”며 만류했지만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윤 후보와 가까운 KT 임원은 “여러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끝까지 가고 싶었지만 회사와 임직원들을 생각해 물러나게 됐다”고 전했다. 윤 후보의 사퇴는 이사회 수용과 금융감독원 공시라는 최종 절차만 남긴 상태다.

윤 후보가 사의를 밝힌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을 내정 단계부터 “구현모 아바타”라고 비판한 정부·여당의 외압이 점차 고조됐기 때문이다. 차기 대표를 선출할 오는 31일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국내외 주주 의결권 자문기관들이 윤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고 소액주주까지 지지하자, 오히려 본인과 주변을 상대로 여권의 압박은 더 거세졌다. KT 관계자는 “후보 내정 단계 때는 기자회견이나 브리핑같이 장외에서 공개적인 방식으로 압박했다면, 최근에는 본인과 주변을 향해 직접적이고 은밀하게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윤 후보가 거취를 고심 중이라는 얘기는 지난 21일부터 KT 안팎에서 돌기 시작했다. KT 사정에 밝은 인사들은 “대통령실에서 윤 후보에게 최후통첩을 했다고 들었다”거나 “KT를 겨냥한 검찰 수사 등에 윤 후보가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무렵부터 회사 차원에서도 윤 후보의 사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표 부재시 대행체제 운영 등에 대한 법적 검토를 시작했다고 한다.

여권과의 소통 창구로 염두에 둔 이들이 줄줄이 회사와 결별한 점도 부담이 됐다. 윤석열 대선 캠프 출신인 임승태 법무법인 화우 고문은 지난 8일 KT 사외이사 후보에 내정됐다가 이틀 만에 철회했다. 윤 대통령의 고교 선배인 윤정식 KT스카이라이프 대표 내정자 역시 정치권에서 구설이 나오자 돌연 대표직을 포기했다. 두 사람이 윤 후보에 대한 여권의 반발 기류가 가라앉지 않자 이 같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업계에선 본다.

윤 후보는 본격화된 검찰 수사에도 압박을 느꼈다. 보수단체는 지난 7일 윤 후보와 구 대표가 KT 계열사인 KT텔레캅의 일감을 특정 시설관리업체에 몰아주고, 이사회를 장악하고자 사외이사들에게 부정한 향응을 제공했다고 주장하며 검찰에 고발했다. 서울중앙지검은 고발 내용이 부당지원 등 공정거래법 위반 성격이 있다고 보고 공정거래조사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KT는 이런 의혹을 두고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지만, 수사를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투명한 주총 표 대결도 거취 문제 촉발


주총 표 대결 승리가 불투명한 점도 윤 후보의 거취 고민을 촉발한 원인 중 하나다. 대다수 의결권 자문기관들이 주주들에게 윤 후보에게 찬성표를 권고하면서 외국인과 소액주주들이 결집하는 모습이 연출됐다. 하지만 KT 최대 주주로 정부를 대변하는 국민연금(지난해 말 기준 지분 10.13%)이 윤 후보에 대한 반대 의사를 철회하지 않으면서 부담감이 컸다.

2·3대 주주인 현대자동차그룹(7.79%)과 신한은행(5.58%)의 행보도 미지수였다. 현대차의 경우 윤 후보 내정 직후 KT에 대표 선출 같은 주요 현안이 있으면 이사회가 대주주 의사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하는 등 여권을 편드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앞서 구 대표 역시 국민연금이 연임 확정 절차를 두고 “밀실 담합”이라고 비판하자 결국 대표직을 포기했다.

올 상반기 통째로 날린 KT, 주요 사업 ‘올스톱’


KT는 윤 후보의 사퇴 시 올해 상반기 주요 사업을 추진할 동력을 상실한다. 윤 후보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로 했던 신규 사내이사 지명도 철회돼 주요 의사결정을 내릴 창구가 없다. 이달 말 구 대표의 임기가 끝나면 대표 대행체제에 돌입하며, 강국현 커스터머부문장이나 박종욱 경영기획부문장(이상 사장)이 신임 대표 선출 시까지 최소 두 달간 키를 잡을 것으로 관측된다. 상법상으로는 구 대표가 임기를 마친 뒤에도 당분간 대행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되든 대행체제는 임시적이기 때문에 올해 상반기에는 제대로 된 업무 추진이 어렵다. KT 관계자는 “각 부서장 지휘하에 기본 업무는 수행하겠지만 투자비 지출 등 굵직한 의사결정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윤 후보를 대표로 선출한 KT 이사회도 격랑에 빠지게 됐다. 주총일에 임기가 만료되는 강충구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여은정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표현명 전 KT렌탈 대표의 사외이사의 임기를 1년 연장하는 안건부터 주총에서 통과될지 불투명하다. 정부·여당의 압력 때문에 물러난 벤자민 홍 전 사외이사의 빈자리도 채우지 못했다. 이사회가 연임을 확정했던 구 대표에 이어 “최고의 적임자”라고 평가한 윤 후보마저 물러나면서 추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KT노동조합도 이날 성명을 내고 “현재의 경영위기 상황을 초래한 이사진은 전원 사퇴하고 즉시 비상대책기구를 구성해 경영 공백을 해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대로 윤 후보 내정에 “그들만의 리그”라며 불쾌감을 드러냈던 여권은 KT를 원하는대로 주무를 절호의 기회를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민간기업인 KT 대표 후보가 연달아 여권 외풍에 쓰러졌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국회 국정조사나 특검 수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윤 후보의 경우 선출 절차가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됐고, 구 대표처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적도 없다. 오죽하면 사내에서는 “이번 기회에 사명을 ‘한국통신공사’로 다시 바꿔야 한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끓는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사회를 무시하고 원하는 사람을 꽂을 때까지 압박하는 정부가 지배구조를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며 “약점을 잡아서 주저앉힌 정보가 정부기관에서 나왔다면 국정농단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안정상 더불어민주당 방송정보통신 수석전문위원은 “기간산업인 통신 영역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회사의 사장을 쫓아낸 구체적인 물증이 잡힌다면 국회 국정감사나 국정조사, 특검 도입을 통해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구교형 기자 wassup0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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