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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태평양전쟁 유족 고(故)이금주 회장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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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변호사 "가해자 아닌 제3자 변제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는 책"

더팩트

태평양전쟁 유가족협회가 고 이금주 회장의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를 출간했다. 이 회장과 함께 일본 법원 소송을 펼쳐온 야마모토 변호사는 "가해자가 아닌 제3자 변제해법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며 출간의 의미를 밝혔다.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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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각계 반발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7건의 소송을 제기하는 등 평생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앞장서 온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장의 평전이 출간됐다.

평전에는 결혼 2년 만에 일제에 의해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긴 아픔을 안고, 여생을 일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매진해 온 이 회장의 한 많은 삶의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회장의 남편은 결혼 2년 만인 1942년 11월 8개월 된 아들을 남겨둔 채 일본 해군 군무원으로 남태평양으로 끌려간 뒤, 1943년 11월 25일 남태평양 타라와섬에서 미군의 대규모 상륙작전 전투 중 사망했다.

그러나 일제 피해자들은 독재정권 하에서 사실상 일본을 상대로 한 권리행사 기회마저 오랫동안 봉쇄당했다. 이 회장은 예순아홉 나이에 1988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은 뒤, 이후 30여 년 일제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길을 걸어왔다.

1990년대부터 피해자들을 결집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소송에 나섰다. 이 회장이 처음부터 일본 법정에서 승소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법정투쟁을 통해 전후 배상 문제를 외면한 일본 정부를 국제사회에 고발함으로써 일본의 반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었다.

몇 번을 넘어지더라도 싸움을 통해 이를 이슈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장의 돈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패소를 각오하고 나선 일종의 ‘투쟁’이었다.

1992년 원고 1273명이 참여한 ‘광주천인 소송’은 이후 대일 투쟁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됐다.

이 소송을 시작으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소송’,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등이 합세해 원고로 참여한 ‘관부재판 소송’, ‘B‧C급 포로감시원 소송’,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한 ‘일한회담 문서공개 소송’ 등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총 7건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일본 사법부에 제기해 일제강제동원 문제를 한일 간 이슈로 끌어냈다.

법정 진술, 재판 방청, 각종 시위, 일본 지원단체와 연대 활동 등 노구를 이끌고 그동안 일본을 오간 것만 무려 80여 차례, 그 사이 일본 법정에서 ‘기각’ 당한 것만 모두 17차례에 이른다.

무모해 보이기만 했던 싸움은, 마침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벽이 하나씩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40여 년 동안 감춰져 있던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고, 강제동원특별법이 제정된 데 이어, 한국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얻은 결실은 이 회장이 들인 땀과 발자취를 빼놓고는 설명이 힘들다.

피해자들의 끈질긴 투쟁은 마침내 2018년 역사적인 한국 대법원 배상 판결로 귀결되었다. 열일곱 번의 좌절을 감수하면서도 다시 부딪혔던 그 집념과 도전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다.

평전은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금주 회장이 외롭게 부딪히며 맞서야 했던 고뇌와 투쟁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컴퓨터도 없는 시대에 이금주 회장은 버스나 택시를 타고 피해자들이 있는 곳곳을 찾아다니며, 하소연할 데 없는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일일이 일기와 기록으로 남겼다.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피해사실을 메모한 자료는 나중에 일본 소송의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재판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일본 변호사들이 그때그때 요청해 오는 서류를 작성해 보내느라 몇 날 며칠을 씨름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이 회장은 자신한테는 엄격했다. 없는 살림에 회비 한 푼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10원짜리 영수증까지 빠짐없이 모아 왔고, 서울 뒷골목 싸구려 여관방을 찾아다니느라 팔순 노인이 빗속에 1시간여 밤거리를 헤매기도 했다.

특히 이 책에는 자신은 물론 아들과 며느리까지, 나중에는 손녀까지 한 집안 3대가 팔을 걷어부치며 인권회복을 위해 일본과 맞서 모든 것을 쏟아냈던 숨은 사연들이 담겨있다.

이 회장은 일제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대한민국 인권상’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2021년 12월 끝내 일본의 사죄 한마디를 듣지 못한 채 10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발간사에서 "이 평전은 온갖 고난과 좌절 속에서도 역사적 소명을 위해 온 생을 던진 이금주 한 개인의 기록임과 동시에, 광복 후에도 풍찬노숙해야 했던 일제 피해자들의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라며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구실로 또다시 일제 피해자들을 그 제물로 삼으려는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 이금주 평전이 시대를 성찰하는데 작은 밑거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변호사 개업 첫 해에 이금주 회장을 만나 이후 일본 소송을 주도해 온 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 변호사는 "최근 한일 간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이러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피해 체험이나 심정에서 벗어난 해결은 있을 수 없다. 피해자는 단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이금주 회장의 인생을 알고 그 심정을 이해하면, 가해자도 아닌 자가 대신 돈을 내는 식의 ‘해결방안’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평전 발간의 의미를 밝혔다.

forthetru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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