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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주권 잃어가는 ‘불편한 세상’에서 ‘지독한 반골’로 사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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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원로배우 권병길 선생을 추모하며

한겨레

고 권병길 배우가 지난 3월1일 임진각에서 열린 ‘휴전선 넘어 비단길 내기’ 평화행진에 참가해 직접 찍은 마지막 사진.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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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별세하셨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을 미국 여행 중 선생님께서 즐겨 쓰시던 페이스북에서 접했습니다. 즉각 뉴스를 뒤졌습니다. “원로배우 권병길 별세… 향년 76.” 허 참, 76살에 노환이라뇨. 제가 즐겨 쓰는 “60청춘, 90회갑”이란 말은 남쪽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듯한 북녘에서 20여년 전 들었어요. 100살 시대 회갑을 14년이나 앞두고 벌써 늙고 쇠약해져 떠나셨단 말인가요?

3월 말 귀국하는 대로 선생님의 사랑하는 고향 후배이자 제가 존경하는 김근환 <청양신문> 대표와 셋이 술 한 잔 나누자고 선생님께서 주선하셨잖아요. 그런데 이토록 허망하게 약속을 못 지키시게 됐으니, 그야말로 이거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널리 알려진 선생님의 명대사대로,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페이스북에서 ‘권병길’ 검색해보니 선생님의 발자취가 잘 드러나는군요. 선생님과의 추억을 지닌 수많은 사람의 글과 사진이 넘치거든요. 가족도 없고 친척도 적은 것 같은 선생님 영결식에 백수십 명이 밤늦도록 추도했다니 선생님의 인덕을 짐작하겠습니다. 예부터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는 말이 있는데, 몸은 비쩍 말라도 맘이 얼마나 넉넉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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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대학로 아트홀에서 <별의 노래> 제목으로 자신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공연했던 고 권병길 배우가 2022년 2월 회고록 <빛을 따라간 소년> 출판기념회에서 인삿말을 하고 있다.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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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28~29일 영등포아트홀에서 공연한 연극 <사천의 선인>에서 고 권병길(맨 오른쪽) 배우가 마지막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극단 경험과 상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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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유난히 제 시선을 끄는 글귀를 곱씹게 됩니다. 조성진이란 분이 올린 글이 “오늘 지독한 반골 연극배우 권병길 선배가 이 불편한 세상을 떠났다”로 시작하는군요. ‘지독한 반골’과 ‘불편한 세상’이 겹쳐있어요. 그래요. 팔팔하던 70대 배우가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뉴스를 믿을 수 없어 수소문했습니다. 한참 후배인 황선 통일운동가도 선생님과 깊은 친분 갖고 추도식에도 참석했다기에 전화했습니다. 대뜸 왜 돌아가셨냐고 물었더니, 3·1절 평화행진을 마친 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일기장 같은 페이스북에 3월1일 남기신 글을 눈여겨보지 않았더군요. “오늘은 실천하는 국민이라는 명제 하에 104주년 3·1절을 맞아 파고다공원 앞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선언’을 하는 자리에 참여하고, 이어서 임진각으로 향해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원탁회의’를 주창하고 걸어서 평화누리까지 향했다.” 주권을 잃어가고 민족통일을 팽개치는 ‘불편한 세상’에서 ‘지독한 반골’이자 ‘실천하는 국민’으로 울분을 참지 못해 화병으로 돌아가신 거군요. 76살 연극배우가 노환으로 별세하신 게 아니라. 하기야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곳도 대학로 연극무대가 아니라,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광화문광장의 한 시위 천막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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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서울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서 ‘빛을 따라간 소년, 우리 시대의 배우 고 권병길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다. 권병길 배우를 추모하는 연극인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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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작년 말 저에게 “교수님 뵙기 염치없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우울한 나날을 숨넘어가듯 지냈습니다”고 하셨는데, 제가 오히려 선생님 뵙기 염치없습니다. 후배들과 제가 선생님 몫까지 주권 찾고 민족통일 앞당기는 편한 세상 이루도록 힘쓸 테니, 2022년 펴내신 책 제목대로,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의 꽃길을 걸으며 푹 쉬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사랑과 존경으로 올림.

이재봉/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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