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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중근 칼럼] 한·일 정상외교 참사,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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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이 촉발한 후폭풍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지원하는 한 시민단체는 21일 탄핵을 언급하며 퇴진을 요구했다. 시민단체의 퇴진 요구에, 또 민주당의 격렬한 비난 언어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처럼 외교 참사라는 데는 십분 공감한다. 윤 대통령은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했지만, 취임 1년도 채 안 된 대통령이 역사의 평가에 기대는 것 자체가 이번 외교가 실패임을 자인하고 있다.

경향신문

이중근 논설주간


이번 일은 현 정부의 외교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먼저 실패가 예견되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같은 윤석열-기시다 선언이 나올 것(중앙일보)”이라고 했지만 회담 전에 이미 공동선언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은 방일은 하되 그에 걸맞은 외교적 행동을 준비해야 했다. 주어야 할 것을 줄이고, 언행도 더 다듬어야 했다. 그런데도 일본의 선의만 기대하며 막판까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표현을 이끌어내기 위해) 샅바싸움을 벌였다. 결과가 불투명한 데도 통크게 내주는 비외교적 선택을 했다. 현찰을 내주고 대신 지불시기도 불분명한 어음을 받은 꼴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정상회담 후 평가를 부탁하자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윤 대통령이) 홀딱 벗어줬다”고 했다. 딱 그 꼴이다.

두번째는 이 사태의 장본인이 윤 대통령 자신이라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제3자 배상안을 밀어붙이라고 지시했다. 외교 초보인 윤 대통령이 상황을 주도한 것이다. 대통령이 가장 경계해야 할 ‘나는 다 안다’와 만기친람 병에 이미 걸린 것 같다. 대통령실에는 온갖 정보가 들어오고 최고의 참모들이 조언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외교의 요체를 간파했다고 자부한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도 “일본이 수십 차례 사과했다”고 했다. 그중 대부분은 마지못해 한 사과이다. 뒤돌아서서 망언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이런 기본을 무시한 사과는 고려하지 않은 채 양국 관계가 과거에 발목 잡히면 안 된다며 미래로 가자고만 하고 있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논리를 확신하며, 이를 미래를 위한 결단으로 포장하고 있다.

참사의 또 다른 주역은 외교 참모들이다. 윤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인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애오라지 한·미 동맹을 외쳐온 사람이다. 윤 대통령과 같은 아파트 주민이었던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은 일본과의 협력에 목을 맸다. 두 사람이 외교안보 사령탑이 된 후 한국 외교안보 정책은 극도로 미국과 일본 일변도로 쏠리고 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학자 출신인데,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나 이론을 정책에서 확인·구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 욕망을 대통령이 제어하면서 조력을 받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정책을 사유화하게 되는 것이다. 두 참모와 윤 대통령의 공사가 뒤얽힌 친밀한 조합이 일을 내기 시작했다고 나는 본다.

북한이 엊그제 800m 상공에서 핵무기를 터뜨리는 훈련을 했다고 밝혔다. 현실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방법이 현실적이다. 미국이 원하는 한·일관계 강화를 통해 미·일과 더욱 가까이 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IRA나 반도체법 등을 보면, 미국도 동맹국을 무조건 보호하지 않는다. 신냉전 체제는 과거 동서 냉전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대처를 요구한다. 무게 중심은 한·미·일 공조에 두더라도 과도한 편중은 지양해야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윤 대통령의 외교 실패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무엇이든 다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외교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 한번 친구는 영원히 친구로, 한번 적은 끝까지 적으로 남을 것처럼 대응하고 있다. 외교안보 사안은 국내 정책과 다르다. 상대국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윤 대통령의 신조는 국내 문제에 한정되어야 한다. 도식적 견해에 빠진 참모들로는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대처할 수 없다. 폭넓고 유연한 사고가 외교정책에 접목되지 않은 한 같은 실패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은 다음달 미국을 방문하고 이어 5월에는 한·미·일 정상이 다시 모인다. 이 자리가 윤 대통령의 진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중근 논설주간 harub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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