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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불구대천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 잡아야”...尹이 인용한 4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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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김대중·처칠·저우언라이, 모두 역사문제 풀어 국가적 실리 취해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국무회의에서 한일 관계 개선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인용한 역사 속 인물은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 등 4명이다. 전쟁이나 식민 지배 등을 이유로 국내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국민 감정을 자극하거나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 지향적 방향에서 역사 문제를 풀어 결국 실리를 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해방된 지 20년 만인 1965년 6월 한일협정을 맺어 국교를 정상화했다. 청구권자금 3억달러와 경제 차관 2억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식민 지배 피해에 대한 모든 배상을 포기하기로 약속했는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를 주장하는 반정부 시위가 격렬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당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박 전 대통령은 협정이 조인된 다음 날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해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이지만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도 필요하면 손을 잡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고 했다. 경제성장에 대한 산업계 요구와 동맹인 미국의 관계 개선 압박이 병존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반일(反日)보다 용일(用日)을 우선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느냐 하는 관건은 우리의 주체 의식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조선일보

왼쪽부터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저우언라이 전 중국 총리.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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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 역시 1998년 한일이 과거사를 직시하되 미래로 가자는 내용의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이끌어내 한일 관계가 전기(轉機)를 맞이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으로 국내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모든 여건이 과거와 다르고 앞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또 1973년 일본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주도하에 괴한들에게 납치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에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관련자 처벌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왜색 문화’라는 여론의 반대에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를 했고, 이는 한국 대중문화의 다양성과 일본 내 한류의 출발점이 됐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 재임 중인 1972년 9월 중·일은 ‘항구적 평화 우호 관계를 확립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전격 방중(訪中) 등으로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고 있을 때였다. 저우언라이 전 총리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만나 “양국이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자”는 구동존이(求同存異)를 말했다. 중국은 일본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쟁 배상 요구를 포기했지만, 배상금보다 훨씬 더 많은 공적개발원조(ODA)를 일본으로부터 받았다.

“현재와 과거를 경쟁시키면 미래를 놓친다”는 처칠 전 총리 발언은 1940년 5월 취임 직후 가진 의회 연설에서 나왔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전세가 독일에 유리해지자 영국에선 전쟁 준비보다 평화 협상에 매달린 전임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 각료들의 책임을 묻자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에 대해 처칠 전 총리는 “지금은 독일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게 중요하지 과거사를 들추는 것은 영국 사회의 분열만 초래한다”며 단호히 반대했다. 이런 리더십이 영국 국민들의 단합을 이끌어냈고, 전쟁의 승전국이 될 수 있었다.

[김은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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