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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신뢰·안전의 스위스 은행? ‘비밀주의’가 되레 위기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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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디스위스, 2000년 이후 21건 스캔들

비밀주의 종말로 은폐된 부실·탈법 드러나


한겨레

악셀 레만 크레디스위스(CS·크레디트스위스) 이사회 의장(왼쪽)이 19일(현지시각)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콜름 켈러허 UBS 회장 옆에서 발언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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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신뢰와 안전의 대명사였던 스위스 은행이 2위 업체인 크레디스위스(크레디트스위스)의 몰락으로 세계 금융위기의 근원지가 되는 굴욕을 맛보게 됐다.

1856년 개업한 크레디스위스는 지난 한주 내내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을 키우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 결국 스위스 내 경쟁자인 1위 업체 유비에스(UBS)에 19일 전격 인수됐다. 지난 몇년 간 이어진 스캔들로 인한 ‘신뢰 추락’이 크레디스위스가 실패하게 된 직접 원인이지만, 세계화로 인해 예전 같은 ‘비밀주의’를 유지하기 힘들어진 영업 환경 변화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크레디스위스는 지난해 1월 안토니오 호르타 오소리오 당시 회장이 코로나19 방역 지침 위반으로 사임했다. 이 은행이 지난 수년 동안 보여준 ‘도덕적 해이’의 한 단면이었다. 이 은행은 2021년엔 한 임원이 5천만달러의 뒷돈을 받고는 모잠비크 정부의 13억달러 예금에 좋은 조건을 제공한 이른바 모잠비크 ‘참치 채권’ 스캔들로 정부로부터 3억5천만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같은 해에 월가를 뒤흔든 대형 스캔들인 한국계 투자자 빌 황의 아키고스자산관리에 대출해 55억달러의 손실을 기록했고, 영국 ‘그린실캐피털’의 부실자산을 은행 고객들에게 팔아 투자금 100억달러가 동결됐다. 스위스 금융당국은 이에 대해 “중대한 감독의무 위반이 있다”는 뼈아픈 지적을 남겼다. 2019년에는 사설 탐정을 고용해 전직 최고경영자 등을 감시한 스캔들, 2018년엔 임원들이 고객의 서명을 위조해 예금을 몰래 인출한 뒤 주식에 투자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벌어졌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해 2월 크레디스위스가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일가가 횡령한 50억~100억달러의 자금을 가명으로 수탁해준 1986년 스캔들 등 21건의 스캔들 사건 일지를 보도했다. <가디언> 등이 참가한 국제 탐사언론은 크레디스위스의 고객 계좌와 관련된 내부 문서를 입수해, 이 은행이 고문·마약밀매·돈세탁·부정부패 등 중범죄에 연루된 3만명 고객으로부터 1000억스위스프랑을 예탁받아 보호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같은 △도덕적 해이 △방만 경영 △위법 등으로 은행에 대한 굳건했던 신뢰가 급격히 추락했다. 그 결과 예금 인출과 주가 하락이 지속됐다. 지난해 마지막 석달 동안 고객들이 크레디스위스에서 1100억스위스프랑(1200억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예금을 인출했다. 그와 동시에 한때 85스위스프랑까지 올랐던 주가는 10일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으로 국제 금융계가 요동치자 1.5스위스프랑 전후로 폭락했다. 스위스 중앙은행은 최대 500억스위스프랑(약 70조8000억원)의 유동성 지원에 나섰으나,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고 결국 인수합병으로 갔다.

크레디스위스는 자본비율과 유동성 등 객관적 지표는 건전한 편이었지만 위기를 이기지 못했다. 한때 세계 금융시장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던 스위스 은행에서 터진 잇딴 스캔들로 신뢰가 추락했기 때문이다. 크레디스위스를 30억스위스프랑(약 4조2300억원)에 인수한 유비에스도 2008년 금융위기 때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고 회생한 바 있다.

스위스 은행들은 예전엔 철저한 비밀보호를 바탕으로 ‘검은돈’도 마다하지 않고 수탁 받아 이익을 챙기는 영업을 해왔다. 이런 비밀보장 관행은 세계화 이전에 각국 금융산업이 개방화되지 않은 조건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7년 자동정보교환(AEOI) 및 공동보고기준(CRS)에 입각한 국가 간 조세징수 협정을 맺은 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종말을 맞았다. 미국은 스위스 은행들에 수사에 필요한 계좌 정보를 제공하라고 강제했다. 결국 감춰졌던 부조리가 드러나며 크레디스위스는 헤어날 수 없는 경영 위기를 맞게 됐다. 악셀 레만 크레디스위스 회장은 19일 매각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회사와 세계 금융시장에 굉장히 슬프고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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