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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정현목의 시선] 미성숙 어른들이 넘쳐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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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정현목 문화부장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일타 스캔들’(tvN)에서 로맨스보다 더 눈길이 갔던 건, ‘복붙’한 듯 옮겨 놓은 사교육 현실이었다. 학원에서 배우고, 학교는 사교육 보조수단이 된 지 오래.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학원 교재 펴놓고 공부해도 교사들은 뭐라 하지 못한다. ‘일타강사’(일등 스타 강사)의 세계 또한 실감 났다. 경제가치가 1조원에 달한다는 최치열(정경호) 같은 일타강사를 모시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학원가 모습, 경쟁 강사를 깎아내리는 댓글 공작 등은 사회면을 장식했던 일들이다.

드라마 속 상위권 학생들은 의대를 지망하지만 왜 의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 따위는 없다. 입시의 대세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가 아닌 ‘의치한수’(의대·치대·한의대·수의대)로 바뀐 세태의 반영이다. 초등생 의대 입시반까지 개설됐다는 뉴스가 생뚱맞지 않은 현실이다. 국정원 수준의 입시 정보력을 과시하는 ‘돼지 엄마’가 학원가와 입시 커뮤니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목 또한 현실을 빼다 박았다. “대한민국 사교육 과열은 엄마들 책임”이라던 반찬가게 사장 남행선(전도연)마저도 이런 ‘현실’을 수긍하고 사교육 열혈 엄마로 변신한다.



‘일타 스캔들’ 사교육, 현실 빼닮아

의대 진학열풍, 피폐한 학생들

아이들이 부모의 꼭두각시인가

한 수험생이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이유로 ADHD 치료제를 복용하다 실신하는 장면 또한 수험생들의 약물의존 현상의 일면을 보여줬다. 입시 강사들도 “너무 쾌적한 강의실 환경, 학생들이 너무 대답을 잘하고 눈빛이 또랑또랑한 점만 제외하면, 드라마가 현실을 잘 묘사했다”고 입을 모은다.

드라마가 그려낸 사교육 현실 중 가장 안타까웠던 건, 병들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명문대 진학만이 살 길이라며 자식들을 몰아세우다 장남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로 만든 변호사 장서진(장영남)은 차남 이선재(이채민)만은 목표를 이뤄야 한다며 혹독하게 수험 경쟁에 몰아넣는다. 급기야 시험지 유출 범죄까지 저지르는 엄마의 그릇된 교육열에 두 아들의 정신은 극도로 피폐해진다.

돼지엄마 조수희(김선영)로부터 초 단위 수험관리를 받는 딸 방수아(강나언) 또한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공황장애, 경쟁자를 제거하는 망상에 시달린다. 친구의 죽음에도 “휴강은 있을 수 없다”는 엄마들 등쌀에 애도할 시간도 갖지 못하는 아이들의 멘탈은 과연 정상일까.

누가 먼저 기저귀를 떼는가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극도의 사교육 스트레스 탓에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사례는 주변에 너무나 많다. 절도와 집단괴롭힘, 학교폭력, 성(性)적 일탈 등이 수험 스트레스와 무관치 않다는 게 현장 상담 교사들의 중론이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부모가 지위와 재력으로 덮어버리기까지 한다. 이렇게까지 해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다 한들 아이들이 주체성을 갖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부모의 지나친 개입으로 장애물 하나 자기 힘으로 넘어본 적 없고, 잘못된 행동마저도 반성하거나 책임져본 적 없는 아이가 정상적인 사회인이 될 수는 없을 터다.

엄마가 자식의 대학 수강신청과 성적 이의신청을 도와주는 건 물론이고, 자식의 인사고과 문제까지도 회사에 대신 항의해주는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우리 사회다. 대기업 다니는 아들이 사무실에서 정수기 물통을 교체했다는 이유로 엄마가 “우리 애가 그런 일 하려고 명문대 졸업한 줄 아느냐”며 회사에 항의했다는 얘기는 결코 드라마 에피소드가 아니다.

부모 욕망의 꼭두각시로 자라난 아이들은 삶의 가치관과 책임의식이 결여된 채 남들 눈치를 보며 자기 잇속만 챙긴다. 소명의식 없는 ‘의료 기술자’, 처세에만 골몰하는 ‘법 기술자’가 생겨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일타 스캔들’에 앞서 부모 욕망에 휘둘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SKY 캐슬’(JTBC)의 한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강준상(정준호)은 엄마 말대로 공부 열심히 해서 학력고사 전국 1등을 하고,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병원장이 되려는 것도 엄마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서다. 출세욕 때문에 스스로 비극을 초래한 그는 엄마에게 “날 이렇게 만든 건 어머니라고요. 내일 모레 쉰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을 만들어 놨잖아요”라며 울부짖는다.

이런 강준상의 모습은 성공 강박에 시달리는 부모의 그릇된 자식 사랑이 만들어낸 미성숙한 어른의 자화상이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딱하기 그지 없지만, 그런 어른이 많아지는 사회는 또 얼마나 암울한가.

정현목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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