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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한국에 석유가?” 불붙은 탐사…세계 최대 공룡화석지 찾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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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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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월 15일 청와대 연두 기자회견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영일만 부근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1차 오일쇼크(1973~1974년)를 경험한 국민은 “산유국이 됐다”며 기뻐했다.

박 전 대통령의 발표에 당황한 곳은 학계였다. “화강암으로 막힌 지하 1400m에서 석유가 나올 수 없다”는 견해였다. 당시 권력 앞에 목소리를 죽였던 반대 학설은 추후 진실로 판명돼 세상에 드러났다. 포항에서 추출된 기름도 원유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면서 석유 시추도 중단됐다.

포항 석유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박 전 대통령의 석유 탐사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원유 탐사 지역이 애초 포항 일대에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대표적인 곳이 포항과 유사한 지층대인 한반도 맞은편 전남 해남이었다.

해남 우항리 석유 탐사는 1978년부터 3년여간 이어졌다. 한국에서 중생대 백악기 때 형성된 검은색 셰일층 존재가 확인된 것도 이때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엔 두 차례에 걸쳐 석유 시추 작업도 진행됐다. 당시 탐사를 주도한 한 학자는 “지층에 라이터를 켜면 불이 붙었다. 유질은 확실히 있었다”고 했다.

결국 지질학계는 해남에서는 석유를 추출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백악기 퇴적층에 유기물층은 있지만, 경제성은 전혀 없다는 분석이다. 지질학자인 정대교(65) 강원대 명예교수는 “해남의 백악기 퇴적층은 기름을 저장할 배사구조나 단층구조인 트랩(trap)을 갖추지 못해 원유를 추출할 수는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원유 발견에 대한 가능성이 희미해진 1990년대 초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석유 탐사 과정에서 뒤집어진 지층 곳곳에서 새 발자국 화석과 공룡 발자국 흔적이 발견됐다. 퇴적층 아래 묻혀있던 발자국은 백악기 말엽 우항리를 오가던 공룡과 익룡의 것으로 분석됐다.

이후 해남에서는 석유 탐사 대신 대대적인 지질학 조사가 이뤄졌다. “한국에서 가장 잘 발달한 퇴적층”이란 분석이 나오면서 국내·외에서 학자들이 몰렸다. ‘공룡 박사’ 허민(62·한국공룡연구센터장) 전남대 교수가 대규모 학술연구팀을 꾸린 것도 이때다.

1996년부터 진행된 공룡 화석지 조사 결과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항리 2㎞ 해안에서 다양한 공룡 발자국 514점과 익룡류 발자국 443점이 잇따라 발견됐다. 같은 장소에서 나온 새 발자국 1000여 점과 규화목·탄화목 화석 수십 점도 학술 가치가 높았다. 허민 교수는 “우항리는 ‘세계 공룡의 집산지’로 불릴만한 다양성을 갖추고 있어 추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996년 여름부터 발견된 대형 공룡발자국 113개도 주목을 받았다. 학계에서는 이를 백악기 때 커다란 덩치의 공룡이 한반도를 누비고 다녔던 증거로 본다. 우항리 일대(123만530㎡)는 1998년 10월 17일 천연기념물 394호로 지정됐다.

이를 두고 국내·외 학계에선 “애초에 찾던 석유보다 가치 있는 발견을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원유를 찾겠다는 시도가 세계적인 공룡 화석지를 찾는 계기가 돼서다. 올해는 박정희 정권 시절 해남에 대한 석유 탐사가 시작된 지 45년이 되는 해다.

현재 해남에는 30여 년에 걸친 발굴 성과를 모은 공룡박물관이 운영 중이다. 바닷가를 따라 조각류 공룡 발자국과 익룡 발자국, 대형 초식공룡 발자국 등을 볼 수 있다. 정대교 교수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미래 에너지가 대세가 돼가는 상황에선 수백만 배럴의 석유보다 값어치 있는 발견이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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