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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학폭 피해 가족으로서 외로운 마음 알아…‘무조건 지지’가 피해 회복의 핵심”[끊이지 않는 학교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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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세종·충청 센터장 엄은하씨

경향신문

지난 4일 세종시 도담동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세종·충청센터에서 만난 위로상담가 엄은하씨. 한 피해학생이 실패했다가 덧그려 더 멋있게 완성된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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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막내 딸이 학폭 피해당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
충청 지역 첫 학폭 상담소 열고
내담자들과 경험 공유하며 위로
피해자 지원 여전히 부족 아쉬워

학생이 하루 중 집 다음으로 긴 시간을 보내는 학교. 그 안에서 또래에게 당하는 학교폭력은 아이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준다.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피해학생의 가족도 고통스럽다. 가해학생에게 응당한 처분을 한다고 해도 피해학생과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위로상담가’ 엄은하씨는 바로 그 고통을 보듬기 위해 학교폭력 피해자 전담 상담을 하고 있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학가협) 세종·충청센터장을 맡고 있는 엄씨는 위로상담을 ‘슬픔을 달래주어 치유와 성장을 도모하는 일’로 규정한다. 그 자신도 학교폭력 피해자의 보호자였던 엄씨는 아픔을 딛고 일어선 경험을 공유하며 학교폭력 피해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지난 4일 학가협 세종·충청센터에서 만난 엄씨는 “학교폭력 피해상담을 내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고 했다.

세 딸을 둔 엄씨는 첫째와 막내가 중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2016년 큰딸의 침대 아래에서 눈물로 얼룩진 유서를 봤을 땐 “왜 아이가 힘들어하는 줄 몰랐을까” 자책했다. 5년 뒤 막내 아이의 손목에 선명하게 그어진 두 줄을 봤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막내 아이는 가해학생 무리가 벌인 ‘돌림따’의 16번째 피해자였다.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엄씨는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 지원 상담을 10년 넘게 해왔는데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117 상담센터, 경찰서, 교육청, 교육청 담당 변호사 등에 이틀간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답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다시 극단적 선택을 할까 걱정돼 병원 4곳에도 전화를 했지만 “한 달 반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10년을 지원상담가로 일해온 나도 이렇게 힘든데 다른 피해학생 부모들은 얼마나 힘들까.”

엄씨는 딸이 학교로 복귀하고 반년이 지난 뒤 ‘학교폭력전문상담기관’이란 문패를 단 상담소를 열었다. 엄씨는 “막내 일을 겪으며 학폭 피해에 대해 전문적으로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충청에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 너무 충격이었다”며 “가정폭력, 성폭력 다 지원상담센터가 있는데 학교폭력은 피해전담기구가 없었다”고 했다. 지난해 4월 학가협 세종·충청지부로 지정받은 상담소에는 위로상담가 3명이 엄씨와 함께 일하고 있다. 다들 피해학생 부모였기에 내담자가 얼마나 외로운 마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상황이 나아질까’ 회의하던 내담자들도 피해학생 부모로서 겪은 경험을 공유하면 힘을 얻곤 한다. “딸이 운동을 배우면서 이겨낸 얘기도 들려드리고 사진도 보여드리면 (내담자들이) 잘해보겠다고 하세요.” 피해학생과 가정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면 엄씨도 힘이 난다. 가장 뿌듯했던 때는 3년간 학교 가기를 거부하던 피해학생이 상담을 받으며 등교를 시작했을 때다. 엄씨는 “아이가 ‘저 이제 지각은 해도 결석은 안 하지 않냐’고 했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며 “이제 개학했으니 다시 연락해봐야겠다”고 했다.

엄씨는 피해회복의 핵심으로 ‘무조건적인 지지’를 꼽는다. 간혹 학교폭력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지 않느냐는 시선이 있는데, ‘네 잘못이 아니’란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전담기구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엄씨는 “어딘가에 누군가 끊임없이 자기를 지지하는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피해회복 지원은 태부족한 실정이다. 가해학생과 온전히 분리돼 교육과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기숙형 쉼터는 대전에 있는 해맑은센터가 유일하다. 엄씨는 “우리도 대전이 가까웠기에 갈 수 있었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상담기관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학가협에서 운영하는 지원센터는 전국에 7곳인데, 그중 엄씨가 운영하는 세종·충청센터가 충청도 전역을 담당한다. 세종시와 먼 지역에 사는 피해학생들은 직접 상담을 오기가 쉽지 않다. 엄씨는 당진처럼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지역을 퇴근 후나 주말에 직접 차를 몰아 방문한다. 엄씨는 “(아이들이) 학교 안에 있는 ‘위클래스’는 학폭 당했다고 공개하는 것 같아 못 간다고 한다”며 “마음 같아선 충청도 각 시마다 상담기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씨는 3월에 피해학생을 지원할 대학생 멘토들을 선발한다. 센터 내 위로상담가와 함께 피해학생들의 ‘내 편’이 되어 줄 이들이다. 엄씨는 “도움받을 기관이 있으니 누구든지 찾아와서 약 바르고 새살이 돋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했다.

글·사진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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