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이자람 음악감독이 창극 '정년이'의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형기 기자> |
때는 6·25전쟁이 끝난 1956년. 당대 최고의 인재만 들어갈 수 있던 예술단에 목포 출신의 열여섯 살 소녀 정년이가 입단한다. 그가 몸담은 곳은 주연과 조연, 감초와 엑스트라까지 배역에 상관없이 모두 여성이 연기를 하는 여성국극단. 이곳에서 그는 꿈을 향해 함께 달려갈 친구와 스승을 만나 무대 위 예인으로 성장해나간다.
웹툰 '정년이'가 오는 3월 17일 국립창극단의 손을 거쳐 창극으로 탄생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국극이라는 신선한 소재와 주인공과 경쟁자, 주변 인물까지 전부 여성 중심인 '보기 드문' 서사가 어우러져 일찌감치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웹툰이 영화, 드라마, 공연 등 다양한 매체에서 변주됐지만 이번처럼 창극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최초다.
"장르의 힘인 것 같아요. 창극이 웹툰을 만나 생긴 시너지 같은 거죠. 원작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국극이고, 이걸 실제 소리꾼들이 직접 선보인다는 놀라움이 컸던 게 아닐까요."
창극 '정년이'의 개막을 약 한 달 앞둔 23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이자람 음악감독은 이 같은 생각을 밝혔다. 그의 말대로 이번 공연은 호응이 벌써부터 뜨겁다. 여성 등장인물에게 으레 씌워지던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 하나 없는 깔끔한 줄거리 덕분일까. 기존 9회차 공연은 티켓오픈 직후 전석 매진을 기록한 데다 추가 공연도 예약이 끝난 상태다. 총 130회가 넘는 웹툰 연재가 두 시간가량 공연으로 압축될 예정이다. 이 감독은 이번 공연에 대해 "한국 문화계가 한 걸음 진일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엔 다양한 여성 서사가 한참 모자라잖아요. '정년이'는 좋은 주제, 좋은 이야기인 동시에 주요 인물이 여성이어도 되는 그런 작품이에요. 고정된 여성 캐릭터만 있지 않아서 그게 참 좋아요. (이런 작품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와야죠."
극 중 정년이의 꿈은 '돈을 가마니로 벌' 정도의 부자가 되는 것이다. 천부적인 소리 재능을 지닌 그는 국극단에서 꿈도 열정도 많은 동료들을 만나 실력을 쌓는다. 1984년 '내 이름 예솔아'로 국악계에 데뷔해 올해로 39주년을 맞은 그가 동질감을 느낄 만한 캐릭터다.
"이게 다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여기 모인 우리들이 다 정년이구나' 생각하는 거죠. 연습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는 건 모두 소리꾼들 본인의 이야기라서 그래요. 인기 웹툰이니 잘해야겠다라는 부담보다는 저 역시도 마음이 좀 편해요."
정년이와 동갑인 16세에는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판소리 하면서 록 음악을 듣고 있었다"는 엉뚱 발랄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폭소를 터뜨리며 "귀에는 펄잼이나 너바나 같은 음악을 꽂고 레슨을 받으러 다니는 국악학교 학생이었다"며 "차원을 넘나들 듯 살았다. 두 가지 모습이 내 안에서 충돌하던 시기"라고 돌이켰다.
최근 뮤지컬 '서편제', 판소리극 '노인과 바다'를 소화하고 이번 작창까지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열정은 꺼질 틈이 없다. 이 감독은 오는 5월 개막하는 연극 '오셀로'를 통해 정극에 다시 한번 도전한다. 그는 "처음으로 일대일 연기수업을 받기 시작했다"며 "본능적으로 무대에서 습득해온 노하우를 수백 년간 배우들이 쌓아온 전문적인 언어로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스스로를 '일 중독자'라고 부르는 그가 올해 목표로 삼은 바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란다. "일하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받는 편이라 쉰다는 것이 마음대로 되질 않아요. 올해는 차분히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세상이 나빠지는 속도를 어떻게 조금은 늦출 수 있을지 고민을 할 때 같습니다." 다음달 3월 17∼2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고보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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