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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정영학 녹취록 속 김만배 말 신빙성 없다”···곽상도 50억 뇌물 무죄 판결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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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록, ‘발언 사실’ 입증 증거는 되지만

‘전해들은 말’은 발화자가 내용 부인하면

‘들은 내용’ 입증 증거로 사용할 수 없어

경향신문

대장동 개발사업을 돕고 아들을 통해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 관련 1심 선고공판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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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법원이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씨가 곽상도 전 국회의원의 아들에게 퇴직금 명목으로 준 50억원을 뇌물로 판단하지 않은 것은 이른바 ‘정영학 녹취록’에 담긴 김씨 말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원은 대장동 민간사업자인 남욱 변호사의 일부 법정 진술이 지난해 석방 후 바뀐 점을 짚으며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이준철)의 곽 전 의원 등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정영학 회계사가 김씨 등과의 대화를 녹음한 녹음파일 중 김씨가 말한 내용을 증거로 사용할 수는 있다(증거능력)고 봤다.

재판에서 김씨는 정 회계사의 녹음 의도가 불순하고, 녹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허위사실을 섞어 말했기 때문에 증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등장인물간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정 회계사가 특정한 답변을 유도·강요하지는 않았다면서 김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오히려 전체적인 대화 내용상 김만배가 정영학과의 관계에서 우월한 지위에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으로 보인다”며 “대화내용에 형사책임이 문제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있고, (김씨가) 오랜 기간 법조 출입기자로서 녹음을 아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주장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녹음파일에 나오는 김씨 말 중에서도 ‘타인에게 전해들은 말’은 경우에 따라 증거에서 배제했다. 재판부는 타인에게 들었다는 내용의 진술(전문진술)의 경우 ‘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을 했다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들은 내용’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로 곧바로 사용할 수는 없다는 법리를 인용했다. 예를 들어 김씨가 녹음파일에서 정 회계사에게 “병채 아버지는 돈 달라 하지, 병채 통해서. 며칠 전에도 2000만원”이라고 말한 대목은 김씨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는 있지만, 김씨가 곽 전 의원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김씨가 곽 전 의원 아들과 나눈 대화를 정 회계사에게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만배에게 전해들었다’는 정 회계사와 남 변호사 진술에 증거능력을 놓고도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했다. 김씨로부터 ‘상도형은 아들내미 줬어’라고 들었다는 남 변호사 진술은 김씨가 부인하는 데다 특별히 신빙할 만한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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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동 특혜와 관련해 아들의 퇴직금 명목으로 50억을 받아 뇌물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국민의힘 곽상도 의원이 지난 8일 오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서울중앙지법에서 기자들과 인터뷰 하는 중 곽의원에게 정치자금을 공여한 혐의로 함께 기소돼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은 남욱 변호사(왼쪽 검은 마스크 쓴 사람)가 지나가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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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지났는데 기억 떠올려? “남욱 일부 진술 신빙성 없다”


판결문엔 재판부가 남 변호사의 석방 전후 진술이 뒤바뀐 점을 짚으며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대목도 있다. 2018년쯤 서울 서초동 한 식당 모임에서 곽 전 의원이 김씨에게 ‘돈도 많이 벌었으면 나눠줘야지’라고 말했다는 것과 관련해서다. 남 변호사는 2021년 10·11·12월 검찰 조사에서는 “돈 얘기가 오고 간 것이 맞다”며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그런데 지난해 5월 재판에선 ‘실제 기억이 나서 진술한 게 아니다’라고 증언했다가, 지난해 11월 재판에선 다시 구체적인 상황이 기억나는 것처럼 증언했다.

재판부는 “사람이 경험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흐려질 수는 있을지라도 오히려 처음보다 명료해진다는 것은 이례에 속한다”며 “시간이 상당히 지난 시점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겪은 일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렸다는 남욱의 설명을 선뜩 납득하기 어려워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녹음파일 내용과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김씨의 ‘아들을 통해 곽상도에게 50억원을 지급할 것’이라는 발언은 믿을 만하지 않다(증명력)고 판단했다. 김씨가 대장동 사업의 공통비 분담 문제로 다툼이 벌어지자 공통비를 덜 내려고 곽 전 의원 등에게 50억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봤다. 김씨가 이른바 ‘50억 클럽’으로 언급된 박영수 전 특검 등 6명에게 50억원을 줘야하는 근거나 이유는 말한 적이 없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김씨가 곽 전 의원에게 50억원을 줘야하는 이유로 ‘수원지검 수사사건을 도와줬다. 뒤를 봐줬다’로 한 데 대해서도 “그 내용 자체만으로도 설득력이 약하다”고 했다.

판결문에는 ‘50억 클럽’의 실체가 없다는 취지의 판단도 담겨 있다. 재판부는 박 전 특검 등 화천대유와 고문계약을 체결한 사람들이 지급받은 고문료가 50억원보다 현저히 낮은 금액이고, 박 전 특검의 경우 고문 계약기간이 2015년 7월부터 2016년 11월까지라 김씨가 50억원 지급 약속을 언급하기 시작한 시기(2017년)와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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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공여 혐의로 기소된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씨가 지난 8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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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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