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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슈 미술의 세계

전시장 앞 노숙자·기도하는 히틀러···유머로 들춰낸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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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 ‘WE’

국제적 화제 모은 대표작·신작 38점 선보여

“블랙 유머·촌철살인으로 공감과 성찰 이끌어”

경향신문

현대 미술계에서 논쟁적 작가로 평가받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개인전이 리움미술관에 마련됐다. 사진은 카텔란의 대리석 조각작품 ‘모두’의 전시 전경(위)과 작품 세부 모습.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도재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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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과 설치의 현대미술전이 해학과 풍자가 흥건한 한 편의 블랙코미디 영화나 연극같다. 현대사회 곳곳에 똬리를 튼 위선적 권위와 부조리, 금기와 이중성, 고정관념을 꼬집으며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삶과 죽음같이 묵직한 실존적 주제도 특유의 유머로 대면시킨다.

리움미술관이 마련한 마우리치오 카텔란(63)의 개인전 ‘WE’(우리)는 왜 그가 세계적 화제 작가, 논쟁적 작가인지 보여준다. 전시에는 1990년대부터 최신작까지 조각·설치 등 38점이 나왔다. 10여년 만의 최대 규모 개인전이다. 대표작들을 통해 신선한 예술적 경험을 하고 카텔란의 진면목을 살펴보는 귀한 자리다.

카텔란은 ‘미술계 악동’으로 불린다. 작가는 스스로를 ‘미술계 침입자’라 말한다. 기존 가치체계를 균열시키는 그의 작품은 여느 현대미술 작품과 달리 어렵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중적으로도 화제를 모은다. 정교한 작업으로 사실적인 데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만큼 간명해 편하게 다가온다. 작품마다 양가적·다층적 의미들이 응축됐음에도 그렇다. 어설프고 부실하게 의미들을 다층화시키다보니 어렵게 느껴지는 작품들과 달리 소통에 기반한 명확한 근거, 논리가 녹아 있다. 고정관념을 깨는 특유의 해학적 표현방식도 공감각·상상력을 자극한다.

리움미술관을 찾는 ‘눈 밝은’ 관람객이라면 입구에서 흠칫 놀란다. 문 옆에 노숙자가 누워있어서다. 로비 바닥에도 태연히 앉아 있어 멈칫한다. 한국 노숙자를 형상화한 신작 ‘동훈과 준호’(2023)다. 노숙자를 보고 우리는 왜 놀라고 멈칫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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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은 리움미술관 전시장 입구(사진)와 로비에 노숙자를 형상화한 작품 ‘동훈과 준호’(2023, 나무, 스티로폼, 스테인리스 스틸, 옷, 신발, 소품, 가변크기)를 설치해 한국의 노숙자 문제를 상기시킨다. 도재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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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작가는 우리 사회의 노숙자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새삼 상기시키는 것이다. 작가의 얼굴을 한 아이가 세발자전거(‘찰리’)를 타고 놀이터처럼 로비를 휘젓고, 도시의 애물단지로 개체수 조절을 당하는 비둘기들(‘유령’)은 공원에서처럼 곳곳에 앉아 있다. 의외의 공간과 작품으로 선입견, 편견을 뒤흔든다.

뜬금없는 상황, 비현실적 장면 등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전시장 바닥을 뚫고 고개를 불쑥 내민 순진한 표정의 한 남성(‘무제’·2001)은 그저 황당하다. 미술품 도둑일까, 굴을 엉뚱하게 뚫은 것일까. 어쩌면 ‘미술계 침입자’라는 작가의 정체성 표현일 수도 있다.

옆의 냉장고 속에는 중년 여성이 미소를 짓고 쪼그려 앉아 있어(‘그림자’, 2023)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물론 작품을 이해하는 데 정답은 없다. 작가는 “개인적 느낌, 생각이 모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코르크 마개가 입을 막은 사진들(‘무제’)이 로비 기둥들에 붙어있는데, 누구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을, 누구는 자발적 순종을, 다른 누구는 성적인 이미지로 각자 달리 느낄 수 있다.

카텔란은 익숙한 상징, 역사나 미술·영화·문학 등 다방면의 사건·작품을 자신의 방식으로 차용한다. 마치 어린 학생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히틀러를 표현한 ‘그’(2001)는 참회, 용서 등 관련 역사적 사건들을 상기시키면서 한편으론 전쟁과 학살·혐오 같은 그의 죄악이 지금도 여전함을 지적한다.

자세히 보면 ‘그’는 얼굴과 복장은 어른이지만 키나 몸체는 어린 소년이다. 애매모호하다. 카텔란의 인물상들이 지닌 특징의 하나인 그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다채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긴 여운을 남긴다.

말은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승리, 영웅을 상징한다. 그런데 ‘노베첸토’는 상징과 달리 축 처진채 천장에 매달려 있다. 승자독식·각자도생 사회가 낳는 실패와 좌절·절망,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흥망성쇠를 그린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제목을 빌린 ‘노베첸토’를 관람하다보면 느닷없이 북소리가 울려 놀란다. 전시장 높은 곳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북을 치는 소년(‘무제’)이 있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다. 오스카는 위기가 닥치면 양철북을 두드린다. 기후위기, 에너지, 전쟁과 질병 등 인류의 난제들을 생각하면 오스카가 북을 두드릴 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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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아홉 번째 시간’(1999, 실리콘 고무, 머리카락, 옷, 십자고상, 돌 등, 가변크기).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도재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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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형상화한 ‘노베첸토’ 뒤로 양철북을 두드리는 소년을 표한한 ‘무제’가 보인다(왼쪽, 사진 도재기). 사진 오른쪽은 화제의 작품 ‘코미디언’(2019, 생 바나나, 덕테이프, 가변크기, 사진 김경태).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리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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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에 맞아 바닥에 쓰러진 교황을 담은 ‘아홉 번째 시간’(1999)은 첫 전시부터 지금까지 전시 장소·맥락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낳는 대표작의 하나다. 가톨릭은 물론 권위의 한 상징인 교황을 직설적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성역·금기·관행 등의 재고, 토론을 유도하는 그의 작업태도가 잘 드러난다.

카텔란은 2019년 전시장 벽에 바나나 한 개를 테이프로 붙인 작품 ‘코미디언’으로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코미디언’이 12만달러(약 1억원)에 팔리는 등 잇단 화제로 예술의 본질, 예술과 상품, 미술 제도·시장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시킨 것이다. 전시장에서 ‘코미디언’도 만난다.

섬세한 아름다움, 숭고미가 두드러지는 9점의 대리석 조각 ‘모두’(2007)는 세계 어느 곳의 전시에서나 깊은 공감을 낳은 대표작이다. 비극적 죽음·참사를 떠오르게 한다. 당장 이태원 핼러윈 참사, 세월호 참사가 소환된다. 시공을 넘어 안타까운 죽음을 상징화한 추념비인 셈이다. 작품 재료도 기념비의 재료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의 대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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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의 작품 ‘무제’(2001, 혼합재료, 가변크기, 왼쪽)와 참회하는 히틀러를 형상화한 ‘그’(2001, 혼합재료, 101×41×53㎝) 의 전시 전경.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도재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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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우리’의 세부 모습(2010, 혼합재료, 78.5×151×80㎝, 왼쪽, 사진 김경태, 리움미술관 제공)과 ‘무제’ 전시 전경(오른쪽, 사진 도재기). Courtesy of Maurizio Catte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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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비판적 통쾌함과 더불어 삶과 죽음, 사랑, 희망 등 인간의 본질을 사유하는 작품들도 있다. 두 남자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우리’(2010)는 죽음을 연상시키며 서늘하게 다가온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 모두의 복잡미묘한 감정, 나아가 인간이 지닌 이중적 자화상, 모순성까지 생각하게 한다. 벽화 ‘아버지’와 사진 ‘어머니’는 가족애, 삶의 애잔함을 새삼 자극한다. 중년 남성이 벗어 놓은 옷처럼 옷걸이에 내걸린 작품(‘무제’)도 마찬가지다. 반면 낡은 신발 속에서 고추가 자라는 ‘무제’는 전시장 한켠에서 희망, 회복, 생명력 등을 조용히 전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그린 그림같지만 미국 국기를 형상화한 스테인리스 스틸에 실탄 사격을 해 만든 ‘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문제를 뜻하는 ‘방 안의 코끼리’란 표현을 담은 ‘사랑이 두렵지 않다’ 등은 패권국 미국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작가의 감각이 돋보인다.

전시기획자인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카텔란은 유머의 힘으로 진지하고 심각한 소재들을 비틀며 신선한 자극을 던져왔다”며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채플린적 희극장치가 적재적소에 작동되는 작품들을 마주하며 공감과 토론, 연대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를 둘러본 한 중견평론가는 “전시도 작품들처럼 도발적으로 튀게 꾸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카텔란을 상징하는 작품을 이렇게 대규모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무료(온라인 예약)이며, 7월16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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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카텔란. 사진 kim je won. 리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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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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