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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재국 인터뷰] "4명이 천국 갔소. 이제 싱싱한 놈은 나 하나뿐"…원년 감독 최고령 생존자 박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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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이재국 전문위원] “이제 싱싱한 사람 나 하나 남은 건가?”

박영길(82). KBO 원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던 인물이다. 최근 한 시대를 동고동락했던 원로 야구인 김영덕 전 감독의 별세 소식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아리다.

삼성 라이온즈 서영무 초대 감독(1934~1987년), 해태 타이거즈 김동엽 초대 감독(1939~1997년), 삼미 슈퍼스타즈 박현식 초대 감독(1929~2005년)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지난달 21일 OB 베어스 초대 사령탑 김영덕 감독(1936~2023년)도 눈을 감았다. 이제 KBO리그 원년 6개 구단 감독 중 생존해 있는 인물은 단 두 명. 박영길과 MBC 청룡의 초대 감독 겸 선수(Player-Manager)였던 백인천(81)이다.

그러나 백 전 감독은 뇌경색 후유증으로 현재 거동이 불편하고 말도 많이 어눌해진 상황. 이제 프로야구 출범 첫해를 생생히 증언할 수 있는 원년 감독은 사실상 박영길 전 감독이 유일하다. 1941년생으로 KBO 초대 감독 중 최고령 생존자이기도 하다.

입춘(立春) 하루 뒤인 지난 5일, 서울 개포동의 박 감독 집 근처 국립국악고 정문에서 만났다. 박 감독은 “이런 날씨에는 뜨끈한 생태탕이 제격”이라며 기자를 인근 단골 생태탕 집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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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암 이겨냈더니 아킬레스건 파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건만 아직 봄이 아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혹한의 날씨는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겨울 끝자락의 바람은 차갑다. 바람보다 더 차가운 건 마음이다. 지난해 9월에는 백인천과 경동고 시절 배터리를 이룬 ‘원자탄 투수’ 이재환 전 일구회장(원년 MBC 청룡 투수코치)의 부고가 날아들더니 해가 바뀌자마자 김영덕 전 감독의 별세 소식이 전해져 야구인들의 마음 한구석을 춥게 만들었다.

“여기 생태탕이 맛있어요. 오늘이 일요일이라 손님이 적은데 평일 점심엔 사람들이 줄을 서요.”

힘 있고 걸걸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박영길은 1962년부터 1975년까지 14년간 붙박이 국가대표를 지내며 동기인 김응용과 대표팀 중심타선을 이뤘던 강타자 출신.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야구가 사상 최초로 일본을 격파하면서 우승할 때부터 ‘좌영길-우응용’으로 불리며 한국야구의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서른 살만 되면 노장 소리를 듣고 은퇴를 하던 그 시절, 박영길은 35세까지 최장수 선수로 뛸 정도로 기량과 스태미나가 남달랐다. 실업야구 시절 각종 타격왕을 휩쓸고 김응용과 홈런왕을 나눠가질 만큼 정교함과 장타력을 동시에 자랑했다. 탁월한 기량뿐만 아니라 최고의 타격 이론가이기도 했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이던 1987년엔 KBO 역사상 최초로 팀타율 3할의 신화를 썼고, 태평양 감독(1991년)을 끝으로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방송 해설과 신문 관전평으로 해박한 야구 지식과 이론을 전파하기도 했다.

사실 그도 건강이 좋은 상황은 아니다. 과거 직장암 수술을 한 전력이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기골이 장대했지만, 최근 얼굴살이 많이 빠졌다. 팔순을 훌쩍 넘어선 나이. 건강 얘기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직장암 수술을 하셨잖아요? 괜찮으세요?

“2010년에 수술을 했지. 이제 10년도 넘었으니까 괜찮소.”

- 이렇게 얼큰한 생태탕 같은 것도 잘 드시나봐요.

“날것만 아니면 괜찮아요. 이젠 몸도 웬만큼 적응이 돼서 가리지 않고 먹어도 됩니다. 근데 생선회라든지 날것을 먹으면 설사를 해요. 직장이 없으니 잡아주질 못해. 길 가다가 화장실을 급하게 찾아야 할 땐 곤혹스럽지. 그것 빼면 괜찮아요.”

- 조금 전에 걸을 때 다리를 절뚝거리시던데.

“한 3~4년 전에 친구들이랑 강원도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터널 안에 차가 막혀서 서 있었는데 뒤에 오던 승용차가 전방 주시를 하지 않았는지 그대로 달려오면서 우리 차를 들이받더라고. 뒷좌석에 앉아 있었는데 왼 다리가 앞 의자 밑으로 밀려들어갔어요. 그때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바람에.”

- 걷는 게 많이 불편하시겠습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인근 얕은 산에 천천히 등산하고 운동할 정도는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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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간 한솥밥…김영덕을 추억하며

박영길은 고 김영덕 전 감독과 인연이 깊다. 프로야구 원년에는 롯데와 OB 감독으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출발했지만, 1984년부터 1986년까지 3년간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김영덕 감독이 1983년까지 OB를 지휘한 뒤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1983년 전기리그가 끝난 뒤 성적부진으로 롯데 지휘봉을 내려놓은 박영길을 타격코치로 불렀다. 박영길은 김영덕 후임으로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삼성 사령탑을 맡기도 했다.

- 김영덕 감독이 세상을 떠났는데요.

“늦게 알았어요. 그날이 발인 날인가? YTN 뉴스를 보다가 자막에 나오는 걸 보고 알았어요. 깜짝 놀랐지. 영덕이 형 핸드폰에 내 전화번호가 없었나? 부고 문자도 안 오더라고. 그래서 조문도 가지 못했어요.”

- 원년 6개 구단 감독 중 네 분이 돌아가셨네요.

”세월이 빠르다는 걸 느낍니다. 다들 일찍 세상을 떠나니 서운하기도 해요. 박현식 선배는 1931년생이니 나보다 10살 위였고, 김영덕 선배하고 서영무 선배는 5년, 김동엽 선배는 1년 위였어요. 김응용도 그렇고 나도 원래는 1940년생인데 호적에 1941년으로 등록됐죠. 당시엔 군대 늦게 보내려고 그런 일이 흔했어요. 백인천은 1년 후배인데 어릴 때 2년 꿇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원년 감독 6명 중에 4명이 천국 가고 나하고 백인천만 살아 있잖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 싱싱한 놈은 나 하나밖에 없는 것 같소. 백인천도 뇌경색으로 건강이 안 좋아 조심해야하는데….“

- 고인과는 추억이 많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삼성에 있을 때 같이 살았어요. 방 3개가 있는 아파트였는데 영덕이 형이 방 하나 쓰고, 내가 다른 방을 썼지. 흔히 한솥밥 먹는 사이라고 하는데 같은 공간에 살았으니까 진짜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지.”

- 김영덕 감독에 대한 첫 기억은 언제였습니까?

“1964년에 김영덕이라는 재일교포 선수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전신) 1군에서도 뛰었던 투수라고 하더라고. 해운공사에 입단한다는 거야. 나는 1962년 남선전기에 입단했는데, 1964년부터 팀 이름이 한국전력으로 바뀌었어요. 그해 4월쯤인가? 실업리그가 개막했는데 우리 팀하고 붙기 전에 다른 팀하고 경기하는 모습을 봤어요.”

- 어떤 투수였습니까?

“사이드암 투수였어요. 강속구 투수는 아닌데 제구력과 변화구가 기막힌 투수였어요. 한국은 그 시절 투수들 구종이 직구 아니면 커브, 두 개뿐이었어요. 그런데 바깥쪽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공을 던지더라고. 알고 보니 그게 슬라이더였어요. 당시 한국에서 슬라이더 던지는 투수가 없었어요. 다들 마구라고 했지. 그 공으로 0점대 방어율(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니 대단했죠. 퍼펙트게임도 하고 노히트노런도 하고.”

김영덕은 페넌트레이스 제도가 처음 도입된 1964년 실업연맹전에서 방어율(평균자책점) 0.32로 불멸의 기록을 세우며 첫해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해 9월 25일 조흥은행전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며 걸음마 단계였던 국내야구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한일은행 시절이던 1967년 9월 17일 실업리그 농협전을 비롯해 노히트노런도 3차례나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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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야구 시대에 선동열이 3차례 0점대 평균자책점(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8)을 기록하지 않았습니까. 그 시절 김영덕의 등장도 그런 분위기였나요?

“더 대단했지. 선동열은 프로 시대에 각 팀 에이스급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기량이 군계일학이었다고 할 수 있고, 김영덕은 국내에 없던 유형의 투수였으니까. 바둑으로 치면 김영덕 선수는 1급이고, 감독이 3급, 국내 최고 선수들이 4급 정도라고 보면 돼요.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다 왔으니 감독보다 야구를 더 많이 알고 수가 더 높았던 거지.”

- 그 정도였나요?

“그 시절엔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 투수가 거의 없었어요. 지도자들도 언더핸드로 던지지 말라고 했던 시절이니까. 재일교포 신용균 투수가 언더핸드로 국내에 싱커를 소개했다면, 김영덕은 사이드암 투수로 슬라이더를 국내에 전파한 투수였어요. 김영덕으로 인해 국내야구에서 사이드암, 언더핸드 투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어요. 투수들은 슬라이더라는 구종을 배웠고, 타자들 기량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게 됐죠.”

- 김영덕 투수 슬라이더는 어땠나요?

“우타자 몸쪽으로 날아오면 타자들이 공에 맞을까봐 뒤로 물러나요. 그런데 가운데로 휘어져 들어가 스트라이크가 되는 거라. 한가운데 공에 방망이를 휘두르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 헛스윙이 되곤 했지. 우타자 몸쪽으로 역회전으로 들어가는 싱커도 던지니까 타자들이 김영덕 투수 공을 칠 수가 없었어요.”

- 감독님도 김영덕 투수를 공략하지 못했습니까?

“하하. 내 자랑 같지만 난 타격왕도 많이 했고, 좌타자라서 그런지 그래도 영덕이 형 슬라이더를 잘 치는 타자였어요. 영덕이 형이 나한테 계속 당하니까 나중에 ‘넌 내가 슬라이더 던질 때마다 알고 쳤냐?’고 묻더라고. 그러면 난 ‘눈 감고 쳤는데 맞더라’고 했죠. 아무튼 영덕이 형은 컨트롤이 기가 막힌 투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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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의 ‘져주기 게임’ 그리고 최동원의 롯데에 KS 패배한 뒷얘기

야구 얘기가 고팠던 것일까. 박영길 전 감독은 원래 다변가지만, 말이 끊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옛날 야구 이야기를 하니 신이 난다”며 비화비사까지 줄줄이 들려준다. 생태탕 뚝배기가 다 비워지고 난 뒤 장소를 인근 커피집으로 옮기고 나서도 이야기가 이어졌다.

- 1983년 롯데 감독 그만두고 삼성에 코치로 가셨잖아요.

“중앙일보가 삼성 계열인데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삼성 라이온즈 사장을 겸했어요. 홍보담당이 중앙일보 사장실로 와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 거기 갔더니 ‘타격코치로 모시고 싶다’고 하더라고.”

- 그러고 보니 KBO 역사에서 감독 출신으로 코치가 된 최초의 사례네요.

“나도 처음엔 체면도 있고 그러니까 삼성 코치로 안 가려고 했어요. 감독 자리도 아니고. 사장이 ‘감독하고 코치하고 직책이 무슨 상관있냐. 대우는 알아서 해주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 뭐라고 했습니까?

“‘사장님은 중앙일보 사장 그만두고 나서 한국일보에서 국장으로 오라고 하면 가겠습니까’라고 했지. 웃더라고. 그런데 김영덕 감독님이 나를 타격코치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 삼성에는 김시진, 김일융, 권영호, 황규봉, 이선희 등등 최고 투수들이 있고 최고 투수코치인 유백만도 코치로 오기로 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타격은 박영길이 최고니 타격코치는 나한테 맡기면 좋겠다고 했다'고 하더라고. 고민을 했죠. 그 전에 영덕이 형하고 있었던 일도 있어서 결국 삼성에 코치로 가기로 했어요.”

- 어떤 일입니까?

“내가 1976년부터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고 있었을 때요. 영덕이 형은 천안북일고 감독으로 가기 전에 장충고 감독(1977년)을 하다 그만두게 됐는데, 나한테 ‘롯데에 코치 자리 없냐’고 물어서 깜짝 놀랐어요. 나보다 선배인데 내 밑에서 코치를 하겠다고 하니 안 그렇겠소.”

- 그 시절엔 지금보다 선후배 관계가 더 엄격할 때 아닙니까?

”그러니까 더 놀랐지. 실업야구 시절이라 선수나 코칭스태프도 회사원처럼 직책에 따라 월급이 정해져 있었어요. 감독인 내가 차장 월급을 받던 시절이었소. 감독이라서 별도로 수당을 좀 많이 받기는 했지만…. 롯데에 얘기를 했더니 감독보다 5년 선배인데 직책이나 대우 문제가 복잡하다면서 난색을 표하더라고. 영덕이 형한데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서운해 하지 않고 오히려 ‘아무도 날 안 챙겨주는데 챙겨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한일은행에서 감독까지 했던 선배가 내 밑에서 롯데 코치를 하겠다고 하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나도 롯데 감독 출신이긴 하지만 삼성 감독이 된 영덕이 형 밑에서 코치를 시작했던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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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이라면 삼성의 ‘져주기 게임’ 흑역사가 떠오른다. 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얻은 삼성은 파트너를 고르기 위해 후기리그 최종전 2경기에서 롯데에 노골적인 고의 패배를 당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롯데는 당대 최고투수 최동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을 제외하면 해볼 만한 상대로 판단했다. 실제로 1984년 페넌트레이스에서 삼성은 상대전적에서 13승7패로 롯데를 압도했다. 반면 OB는 원년에 삼성을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팀이었다. 페넌트레이스에서 9승11패로 밀렸고, 김영덕 감독이 1983년 OB에서 나올 때 서로 껄끄러운 감정이 생겼다. 그러면서 결국 OB 대신 롯데를 파트너로 골랐다.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 최동원이 홀로 4승을 따내면서 삼성은 다시 준우승에 그쳤다.

- ‘져주기 게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뒷얘기를 해도 되지 않겠소. 사실 영덕이 형이 내 말만 들었으면 삼성이 우승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 무슨 말씀인가요?

”후기리그에서 삼성이 우승할 수 없게 되면서 한국시리즈를 해야할 상황이었어요. 광주 원정 때 묵는 신양파크호텔로 기억해요. 김영덕 감독 주재하에 나, 유백만 코치, 정동진 코치가 모였는데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누가 됐으면 좋을지 회의를 했어요. 거기서 나는 최동원이 있는 롯데보다는 OB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오는 게 낫다고 얘기를 했지. 내가 실업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하던 당시에 최동원을 스카우트했고, 1981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최동원을 데리고 우승을 했어요. 누구보다 최동원을 잘 알고 있었어요.“

당시 롯데는 김시진을 앞세운 경리단에 2연패 후 4연승으로 우승했는데, 최동원은 6경기에 모두 등판해 2승1세이브를 올리며 롯데 우승을 이끌었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중 5경기에 등판해 4승1패 신화를 쓰기 전에 이미 실업야구에서도 그런 퍼포먼스를 펼쳤다.

- 최동원을 경계했네요.

”삼성이 그해 정규시즌에서는 비교적 최동원 공략을 잘 했지만(최동원은 정규시즌 27승13패6세이브를 기록했지만 삼성전에서는 2승4패3세이브로 성적이 저조했다), 최동원은 그해 페넌트레이스에서는 구원으로 거의 매일 대기해 지쳐 있었어요. 그럴 때 삼성하고 만날 때가 많았어요. 그런데 최동원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3일만 쉬면 완전히 충전이 됩니다. 한국시리즈 같은 단기전에서는 혼자 다 던지겠다고 할 투수라….

- OB가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됐다면 어땠을까요?

당시 OB에는 박철순이 허리부상으로 없었고, 사실 장호연(평균자책점 1.58로 1위) 정도 빼면 삼성 타자들이 다 붙어볼 만한 투수들이었어요. 김시진 김일융은 OB 타선을 1~2점 내로 막아내는 투수들이었어요. 왼손 권영호에 오른손 황규봉이면 누가 나가더라도 이길 수 있다고 봤거든.“

- 그럼 결국 김영덕 감독이 롯데를 선택한 거네요.

”아무래도 영덕이 형은 OB가 껄끄러웠나 봐. 원년에 우승한 경험이 있는 팀이라면서 롯데로 가자고 하시네? 유백만 코치하고 정동진 코치는 가만히 있더라고.“

- 결국 ’져주기 게임‘도 하고 한국시리즈 우승도 놓쳤으니 후폭풍이 컸을 것 같습니다.

”져주기 게임은 삼성 그룹하고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었는데 워낙 비난을 많이 받다 보니 한국시리즈 끝나고 그룹에서 감사가 나왔어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라 김영덕 감독하고 우리 코치들이 자발적으로 모두 사표를 썼죠. 이달종 단장을 만나 사표를 그룹에 보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 됐지 뭡니까.“

- 무슨 말씀인가요?

”이건희 회장이 보고를 받고는 깜짝 놀랐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사표를 반려했대요.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얼마나 스포츠인답냐‘면서 ’기업도 스포츠인들처럼 책임감 있게 일을 해야한다‘고 칭찬을 했다고 하더라고. 오히려 ’삼성이 더 야구를 잘하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하냐‘면서 이듬해 스프링캠프를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에 있는 LA 다저스 캠프로 보내줬어요. 삼성이 한국에서 최초로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로 간 거죠. 이건희 회장도 참 대단하신 분이지.“

- 1984년 삼성이 우승했다면 삼성은 물론 김영덕 감독의 야구인생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지금 생각해도 그 점이 아쉽지. 1985년 전기리그, 후기리그를 모두 우승해 한국시리즈를 없애면서 통합우승을 했는데 그건 우승으로 쳐주지도 않더라고. 영덕이 형도 원년 OB에서 우승 감독이었고 1984년 삼성 통합우승도 했는데, 결국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한테 지고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한테 지니까 ’우승 못하는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지. 삼성이 불운하기도 했어요. 1984년 롯데 최동원한테 지고 나니까 1986년에는 해태 선동열이 나타났으니까. 김영덕 감독은 최동원 선동열 폭풍을 못 피하면서 결국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게 됐어요.“

- 김영덕 감독에 이어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삼성 감독을 맡았습니다.

”나도 코치로서 책임을 지고 김영덕 감독하고 함께 물러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구단에서 저한테 감독을 맡기더라고. 나 역시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선동열 폭풍을 못 피하면서 1988년을 끝으로 삼성에서 물러났고요.“

김영덕 감독은 1988년부터 1992년 빙그레(현 한화) 이글스에서 지휘봉을 잡고 4차례(1988, 89, 91, 92년)나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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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야구 발전을 위하여

- 요즘도 야구 보십니까?

”별일 없으면 TV 중계 거의 다 봐요. 프로야구도 보고 당신이 해설하는 고교야구도 보고 그러지. 야구 말고 뭘 보겠소. 야구 보는 게 낙이지.“

- 야구 보면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TV로만 보니 정확히 선수 심리나 상황은 잘 몰라요. 그래도 타자들 보면 대충은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KIA에 간 나성범을 보면 좀 아쉬운 면이 있지. 나성범은 이승엽과 박병호의 대를 이어 50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홈런이 그만큼 안 나오고 있어요. 홈런을 더 많이 쳐서 슈퍼스타가 돼야 해요. 타율도 좋고, 라인드라이브 타구도 좋지만 나성범은 타격훈련 때부터 무조건 외야로 보낸다는 생각으로 타구를 띄워 쳐야 해요. 한국야구 홈런왕 계보를 이어가야 할 선수를 꼽자면 난 나성범이라고 봐요.“

- 이정후는 어떻습니까.

”이정후는 이미 슈퍼스타지. 이정후가 타석에 나오면 관중들이 미치잖아. 그렇지만 메이저리그에 가려면 시속 160㎞대 강속구를 쳐야 성공할 수 있어요. 지금보다 배트가 더 빠르고 간결하게 나와야 합니다. 배트가 나가는 길이가 아직 길어요. 150㎞ 공은 마음대로 쳐도 155㎞ 이상 공은 타격 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어려워요. 똑같은 스타일로 대응하면 막힐 수밖에 없어요. 박병호도 미국에서 고전한 게 160㎞ 안팎의 공을 쳐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죠. 결국 공에 배트가 밀리면서 손 부상도 오고 그랬잖아요.“

- 결국 시속 160㎞를 던지는 투수가 더 많아져야겠네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속 160㎞ 던지는 투수가 몇이나 됩니까. 키움 안우진이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데 어쩌다 한 번 찍히지 계속 던지는 건 아니잖아요. LG 마무리투수(고우석)하고 사이드암 투수(정우영)도 빠르지만 평균 155㎞ 정도고. 일본도 오타니 쇼헤이가 미국 가고 나니까 일본 타자들이 160㎞대 빠른 공에 적응할 기회가 아무래도 적죠. 그래도 일본은 요즘 빠른 공 투수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일본 야구가 100점이라면 한국야구는 85점 정도 와 있지 않나 싶어요. 타격 수준은 결국 투수 수준입니다. 우리나라에 160㎞ 던지는 투수가 10명 이상 된다면 한국야구도 빠르게 발전하게 될 겁니다. 선동열 같은 투수가 1980년대에 5~6명만 있었다면 한국야구는 더 빨리 발전했을 텐데 불행하게도 선동열 같은 투수는 선동열 딱 1명밖에 없었어요..“

- 머지 않아 WBC가 열립니다.

”오히려 2006년 2009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때 멤버가 더 좋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일본프로야구나 메이저리그에 통할 선수가 10명 가까이 됐어요. 이승엽 이대호 이종범 등은 일본에서 뛰었던 선수고,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 김선우 봉중근 등등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나왔죠. 근데 지금은 몇 명이요? 일본프로야구나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만한 선수들이 많아질 때 한국야구도 더 강해질 거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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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감독은 ”오랜만에 야구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겁다“면서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프로야구 창립 비화부터 시작해 초창기 역사 속에 숨은 진실들, 타격 이론 등등 이야기 보따리를 끊임없이 풀어냈다. 결국 인근 국수집에서 저녁까지 먹은 다음에야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박 전 감독은 ”영덕이 형하고 백인천을 마지막으로 본 게 3~4년 전은 됐을 것 같다“면서 KBO를 향해서도 아쉬움을 나타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다들 고생했잖아요. 그땐 구단 프런트나 고위 관계자들이 야구를 잘 모르니까 감독들이 시스템을 다 만든 시대였어요. 당시엔 흥분한 관중들이 경기 도중에 병이며 오물을 그라운드에 던지기도 했고…. 그런 가운데 초창기 멤버들이 프로야구 기반을 닦았잖아요. 정운찬 총재 시절까지 그래도 KBO가 원로들을 자문위원으로 한 번씩 초대해 서로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다음 총재 시절에 없어졌어요. 코로나19 영향도 있었겠지만. 영덕이 형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도 4년 전 KBO 자문위원회 자리였어요. 지금 안 되면 골든글러브 시상식 같은 자리에서라도 김영덕 선배한테 공로상 하나 정도 줘도 된다고 생각해요. 영덕이 형은 떠났지만 유족이 있잖습니까.“

원년 감독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가는 게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제 죽기 전에 내가 후배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건 다 전수해주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고등학교도 좋고, 중학교나 리틀야구도 좋아요. 일선 후배 지도자들이 내가 필요해서 불러주면 기꺼이 찾아가겠소. 당신이 아마추어 야구 해설도 하니까 중간에 다리도 좀 놔주시오. 그동안 야구밥 먹고 살았는데 내가 힘이 있을 때 도움을 주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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