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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한국군 총격 명백한 불법”… 추가 소송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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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55년 만에… 법원 ‘베트남전 학살’ 첫 인정

퐁니 마을 생존자 손 들어줘

3000만100원 배상 지급 판결

국방부 “후속조치 검토 예정”

소멸시효 완성 주장도 인정 안해

재판부, 원고 측 주장 대부분 수용

응우옌씨 “희생 영혼에 위로 될 것”

외교부 “양국 현안 긴밀히 소통”

베트남전쟁 이후 제기된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의혹에 대해 우리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향후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다른 피해자들의 추가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세계일보

응우옌티탄 씨가 7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대한민국 상대 소송' 1심 선고기일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뒤 화상 연결을 통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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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7일 베트남인 응우옌티탄(62)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가 요구한 3000만100원을 전부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응우옌씨는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의 퐁니 마을에서 발생한 ‘퐁니·퐁넛 학살 사건’의 생존자다. 당시 한국군 청룡부대 소속 군인들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에서 주민 74명을 사살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응우옌씨는 이 일로 어머니와 언니 등 가족 5명을 잃었고 2020년 4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한국 정부는 베트콩(베트남의 공산주의 군사조직)이 한국군으로 위장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해당 부대를 한국군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게릴라전이 빈번했던 베트남전 특성상 정당행위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박 부장판사는 그러나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 군인들이 작전 중 원고의 가족과 친척들을 위협하고 이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며 “이는 명백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국방부는 “관련 기관과 협의해 후속조치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세계일보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씨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한민국 상대 민사소송 1심 선고 공판에서 일부 승소한 뒤 화상 연결을 통해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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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韓 책임 첫 인정

“제가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 진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티탄씨가 지난해 8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실을 찾아 전한 말이다. 그의 이런 바람은 사건 발생 55년 만인 7일 법원의 판결을 통해 이뤄졌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이날 응우옌씨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과 당시 마을 민병대원의 증언 등 여러 증거를 바탕으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 발생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 해병대 군인들이 원고 집에 이르러 실탄과 총으로 위협하며 원고 가족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총격을 가했다”며 “원고의 가족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원고 등은 심각하게 부상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정부 측은 1965년 한국과 월남 사이에 체결된 ‘한·월 군사실무 약정’에 따라 베트남인들이 한국 군인들에 의해 입은 피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군사 당국 및 기관 간의 약정서는 합의에 불과하다”며 “베트남 국민 개인인 원고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청구권을 막는 법적 효력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배상 청구권을 갖는다고 인정한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유사한 논리다.

불법행위 시점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소멸시효가 이미 완성됐다는 정부 측 주장 역시 “원고가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채권자에게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사유가 있었기에 소멸시효를 적용하면 안 된다는 응우옌씨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원고 측이 지연이자를 ‘소장 송달일’로부터 계산해달라고 청구한 것에 대해서는 ‘변론 종결 시’부터 따져야 한다는 취지로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해의 정도, 배상의 지연, 물가 및 통화가치의 변화 등을 고려해 정부가 응우옌씨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를 4000만원으로 정했다. 그러나 응우옌씨가 청구한 금액을 초과해 인정할 수 없어 3000만100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응우옌씨 측이 위자료 청구액에 100원을 더한 이유는 소송가액이 3000만원 이하인 경우 소액 재판으로 분류돼 ‘법정 공개주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고 판결 이유 공개도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재판 결과를 기다린 응우옌씨는 선고 직후 소송 대리인단과 화상 연결을 통해 “뛸 듯이 기쁘다. 사건으로 희생된 74명의 영혼에게 오늘의 소식이 위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도와주신 한국의 변호사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대리인단은 “대한민국의 공식 기구가 최초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인정한 것”이라며 “사법기관이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문과 사과문을 보냈다고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판결이 미칠 외교적 파장도 작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외교부는 이날 선고 직후 “한·베트남 양국 정부는 양국 관계가 미래 지향적으로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제반 현안에 대해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종민·구현모·홍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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