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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단독] “성추행 때 폭행·협박당한 피해자, 10%도 안 돼” 정부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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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결과 초안 입수

연구진 “강간죄 개정 적극 검토 필요” 제언


한겨레

한국여성민우회와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 등 전국 208개 여성인권단체가 속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회원들이 지난 2019년 9월18일 오후 국회 앞에서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간강죄 구성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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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피해자 대다수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상태에서 피해를 겪었다는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성가족부는 최근 강간·강제추행죄 구성요건을 현행 ‘폭행·협박’에서 ‘동의여부’로 바꾸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했다가 법무부의 반대로 9시간 만에 입장을 철회했지만, 정부가 추진한 실태조사에서도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이 더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정부가 성폭력 처벌 사각지대를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7일 <한겨레>가 확인한 ‘2022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결과 초안을 보면, 성추행 피해를 겪은 상황을 복수 응답으로 물었더니, 피해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다고 답한 여성 비율은 각각 2.7%, 7.1%로 집계됐다. 이 둘을 합쳐도 10%가 안 되는 셈이다. 반면, ‘가해자의 속임수’로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는 응답이 34.9%로 가장 많았다. 이런 성폭력 예로는, 연기 조언을 해주겠다며 피해자를 유인해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자신이 새로 이사한 집을 같이 구경하자며 피해자를 데리고 간 다음 성폭력을 행사한 일 등이 해당한다. 그 밖의 답변으로는 폭행·협박 없이 갑자기 성추행(26.6%), 가해자의 강요에 의한 성추행(18.7%), 가해자가 자신의 지위(권한·위력)을 이용한 성추행(16.2%)이 뒤를 이었다. 강간(강간미수 포함) 피해도 강요에 의한 피해가 41.1%로 폭행(23.0%)이나 협박(30.1%)에 따른 피해보다 더 많았다.

‘성폭력 안전실태조사’는 여성가족부가 성폭력방지법(성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7년부터 3년 단위로 실시하는 것으로, 이번 6번째 조사다. 여가부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 의뢰해 지난해 8∼10월 전국 19살 이상 64살 이하 1만20명(여성 48.7%, 남성 51.3%)을 대상으로 이번 조사를 진행했다.

실태조사를 벌인 연구진은 지난 1월 여가부에 보고서를 제출하며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검토를 정책 제언으로 제시했다. 현행 강제추행죄와 강간죄는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폭행·협박을 구성요건으로 하는데, 이를 고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폭행·협박을 수반하지 않은 기습 추행이나 강요, 지위 이용 등의 상황에서 성추행이 더 많이 발생하고 있고, 강간(강간미수 포함) 피해 역시 폭행·협박이 없는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며 “폭행·협박을 전제하고 있는 강간죄 구성요건 변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 움직임은 반대로 가고 있다. 여가부는 지난달 26일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발표하며, 강간죄 구성요건을 현행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법무부의 반대로 반나절 만에 이를 철회했다.

여성단체들은 현행법이 성폭력이 일어나는 맥락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며 강간죄 개정을 촉구했다. 최유연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최근 법원 판결에서도 강요에 의한 성폭력이었는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평소 어땠는지 등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맥락을 살핀 판례가 종종 나오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에서 심각한 폭행·협박이 동반되지 않으면 가해자의 성폭력이 성폭력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폭행·협박을 전제로 하는 지금의 강간죄 규정은 수사·사법기관이 성폭력 범죄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가해자의 범행보다 피해자의 저항 유무를 확인하는 일에 더욱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피해자를 의심하게 만들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법무부와 여가부가 ‘비동의 강간죄’ 도입 정책과제를 철회한 것은 시민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국가로서의 책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여성 응답자 사이에서 성추행 가해자로 가장 많이 지목된 유형(복수응답)은 ‘전혀 모르는 사람’(58.6%)이었다. 그다음이 ‘직장 상사·동료, 거래처 사람’(22.3%), ‘학교 선후배, 동급생, 교수, 교사, 학원 강사’(13.4%) 순이었다. 반면 주된 강간 가해자는 ‘학교 선후배, 동급생, 교수, 교사, 학원 강사’(20.5%)로 조사됐고, ‘친구’(19.9%), ‘전혀 모르는 사람’(17.1%), ‘소개팅, 맞선 등으로 만난 사람’(12.3%)이 뒤를 이었다.

해당 보고서는 정책연구관리시스템인 프리즘에 게시됐다가 〈한겨레〉 취재 이후 삭제됐다. 여가부 관계자는 “실무자 실수로 보고서 요약본이 공개됐다”며 “현재 연구진이 제출한 보고서에 내용상 오류 등이 없는지 검토 중이다. 최종 보고서는 오는 4월께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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