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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문화장벽 허물고 오롯이 전하는 우리소리…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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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소리꾼들 ‘마이 판소리’ 공연

유럽 출신 블라보·가샤르·예이츠

판소리 매력에 빠져 한국行 결심

무대서 ‘이별가’·‘흥보가’ 등 열창

“의미있는 곡” 자유자재 실력 발휘

스승 민혜성, 해외보급 노력 결실

“외국에서 접할 기회 더 많아지길”

“인생 백년 꿈과 같네… 날 적에도 슬프고 가는 것도 슬퍼라. 날 적에 우는 것은 살기를 걱정해서 우는 것이오, 갈 적에 우는 것은 내 인생을 못 잊고 가는 것이 서러워 운다… 엊그제 청춘 홍안이 오늘 백발이 되고 보니 죽는 것도 섧지마는 늙는 것은 더욱 섧네…”.

4일 서울남산국악당.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2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마이 판소리’ 공연 무대에 등장한 안나 예이츠(34·독일)가 판소리 단가 ‘인생백년’을 열창하자 관객들은 ‘얼씨구’, ‘좋다’, ‘잘한다’ 등 다양한 추임새를 넣으며 환호했다. 2020년 서울대 국악과 조교수(인류음악학)로 임용된 예이츠는 유창한 한국어로 “보통 교육자이자 연구자로 활동하지만 오늘은 소리하는 안나 예이츠”라며 “이 단가를 부르면 박송희 선생님이 떠오르는, 제게 매우 의미 있는 곡”이라고 소개했다. ‘인생백년’은 판소리 동편제 거목 박록주(1905∼1979) 명창이 운명하기 전 남긴 말에 제자였던 박송희(1927∼2017) 명창이 작창한 단가다. 예이츠는 약 8년 전 처음 만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며 ‘인생백년’도 직접 불러주던 박송희 명창과의 인연을 전한 데 이어 ‘춘향가’ 중 ‘이별가’를 구성지게 불렀다.

세계일보

4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마이 판소리’ 공연은 판소리의 매력에 푹 빠진 외국인 소리꾼들이 출연한 무대로 많은 한국인 관객을 감탄케 했다. 왼쪽부터 빅토린 블라보, 가향스 가샤르, 안나 예이츠. 비온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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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공연한 빅토린 블라보(39·프랑스)와 다음 차례인 가향스 가샤르(27·〃)도 옆에서 지켜보며 ‘소리 벗’에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앞서 ‘춘향가’ 중 ‘적성가’와 ‘흥보가’ 중 ‘흥보 마누라 음식 차리는 대목’을 맛깔나게 불러 갈채를 받은 블라보는 “저도 춘향이처럼 그리워하면서 못 만나는 사람이 있었고, 흥보처럼 기적 같은 날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사람들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다”고 선곡 배경을 설명했다.

‘흥보가’ 중 ‘비단타령’과 ‘춘향가’ 중 ‘그네 뛰는 대목’을 들고 나온 가샤르도 전혀 긴장한 기색없이 시원스럽고 기세 좋은 소리를 뽑았다. 객석에서 “예쁘다”는 탄성이 나오자 “감사합니다”라며 여유를 부려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박송희 명창의 애제자로 이들 외국인 소리꾼을 길러낸 민혜성(51·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소을소리판 대표는 제자들의 빛나는 순간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함께 신명 나는 무대를 선보인 그는 “2007년부터 외국에 나가 판소리 씨앗을 심었는데 싹이 나 감사하다”고 벅찬 표정을 지었다. 민 대표는 2007년 정부의 ‘전통예술 해외진출 지원 사업’에 참여한 뒤 매년 단기 과정으로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 해외에서 현지인들을 가르치며 판소리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블라보와 가샤르가 판소리에 푹 빠진 것도 각각 2014년과 2015년 파리 한국문화원의 판소리 워크숍에서 민 대표의 소리를 듣고서다. 공연 전날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그 당시를 떠올린 두 사람은 “오페라 가수들처럼 몸이 크지도 않은데 엄청난 성량의 소리가 나오고,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새 소리 등 다양한 동물 소리까지 내는 게 충격적이고 신비로웠다”며 “바로 판소리에 반해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3년쯤 흘러 판소리를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국에 온 두 사람은 한·불 번역(블라보)과 숙명여대 대학원 한국사 석사 과정(가샤르) 등을 하며 민 대표에게 집중 지도를 받아 왔다.

영국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밟던 예이츠는 2013년 런던 한국문화원의 판소리 ‘적벽가’ 공연을 보고 아예 진로를 판소리 연구로 바꿨다. “새타령과 조자룡 활 쏘는 대목을 듣는데 소리 자체도 놀랍지만 한 사람이 부채를 들고 고전소설 속 모든 장면을 그려내는 게 신기했어요.” 인류음악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박사 과정 2년 차이던 2015년 방한해 박송희 명창 등 국악인 60명 정도를 인터뷰했고, 그때 만난 민 대표의 권유로 판소리에 입문했다. 세 사람은 언어 장벽에다 서양 음악과 다른 박자와 리듬, 몸 전체로 울려야 하는 통성 등을 익히느라 애를 먹었지만 산에 들어가 수련하는 ‘산공부’ 등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들은 K팝 등 다른 한류 콘텐츠처럼 판소리 같은 전통음악 역시 세계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보는데 해외에서 접하거나 배울 기회가 적은 점이 아쉽다고 했다. “판소리 해외 보급과 확산을 위해 정부가 충분히 지원했으면 좋겠어요.”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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