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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詩想과 세상] 입춘(立春)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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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입춘이면 몸을 앓는다
잔설 깔린 산처럼 모로 누워
은미한 떨림을 듣는다

먼 데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눈발이 눈물로 녹아내리고
언 겨울 품에서 무언가 나오고

산 것과 죽은 것이
창호지처럼 얇구나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
아픈 몸 웅크려 햇빛 쪼이며
오늘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좋았다

언 발로 걸어오는 봄 기척
은미한 발자국 소리 들으며

박노해(1957~ )

24절기로 치면 한 해의 시작은 입춘이다. 겨울이 물러난 자리에 봄이 들어선다. 환절기에는 몸이 적응하는 데 애를 먹는다. 시인도 예외는 아닌지라 앓아눕는다. 모로 누워 봄의 “은미한 떨림”을 느낀다. 봄이 오는 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깊이 와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산 것과 죽은 것이/ 창호지처럼 얇”다 했으니, 무척 아픈가 보다. 몸이 아프니 “가만히 숨만 쉬어도” 되지만, 그리 있으면 봄이 온 줄도 모른다. 힘없는 사람들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시인은 시 ‘길이 끝나면’에서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봄이 걸어나온다”고 했다. 새로운 길과 또 다른 문도 열린다고 했다. 시인은 암담한 사회 현실과 열악한 노동 현장을 고발한 시집 <노동의 새벽>을 냈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이 낸 시집은 ‘불온’ 딱지가 붙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시인이 외친 ‘노동 해방’은 이뤄졌을까. 사람만이 희망이라 했는데, 노동자들이 살 만한 세상은 왔을까. 땅에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 이 봄에 ‘희망’을 틔워도 될까.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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