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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안전불감·참사의 정치화… 변한 게 없다 [이태원 참사 1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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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이태원 참사가 남긴 것

인적 줄어 침묵의 거리 된 ‘그곳’

이태원역 승하차 인원 유례없는 감소

코로나19 유행 완화로 회복세 보이다

참사 이후 팬데믹 초기보다 발길 뜸해

“내 목숨 내가 지키자” 당국 불신

사건 접한 온 국민이 트라우마 당사자

“예전엔 사람 많은 전철 참고 갔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중간에 내린적 있어”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앗아간 이태원 압사 참사는 남은 이들에게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가야 할 책무를 남겼지만 현실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계일보

‘이태원 압사 참사’ 100일을 맞은 5일 참사가 발생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10·29 이태원 참사 기억의 길’로 불리는 이 골목에는 ‘기억은 힘이 셉니다’라는 현수막과 함께 시민들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며 작성한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이제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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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00일을 맞은 5일 세계일보가 만난 유가족과 추모객, 그리고 이태원 상인과 시민들은 사회 곳곳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과 소모적인 ‘참사의 정치화’, 재발방지 논의 실종, 미온적인 책임자 규명 등으로 이태원 참사의 교훈이 퇴색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도 여전했다.

2017년부터 6년간 이태원에 거주하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고명찬(35)씨는 “현재 이태원을 보면 당장 체감하지 못해도 분명히 심리적으로 어딘가 고장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며 “이 사건을 접한 전 국민이 트라우마 당사자”라고 말했다. 직장인 이모씨는 최근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놨다. 이씨는 “최근 1호선 종각역에 내렸는데 계단으로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자연스럽게 이태원 참사가 머리에 떠올라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며 “우리 모두가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대학생인 김현수(24)씨는 사고 후유증으로 사람이 많은 곳을 가면 공포를 느낀다고 전했다. 김씨는 “(참사 후로) 사람 많은 곳을 가면 종종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며 “지하철을 탈 때 과거에는 사람이 많아 몸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붐벼도 참고 갔는데 이제는 ‘이거 너무 아닌 것 같다’ 싶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중간에 내린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직장인 김민주(28)씨도 “참사 후로 지하철을 탈 때나 여행을 갈 때 안전사고 걱정에 불안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때까지는 해프닝,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번 참사를 겪으면서 (안전 문제가) 구조적인 문제일 수 있겠다, 난 그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일상 전반에 불안감이 커졌다”고 토로했다. 현장에서 참사를 목격한 김모(27)씨는 “출퇴근 지하철을 타면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환승하는 상황이 전에는 짜증 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들어 견디기 어렵다”고 전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김명임(58)씨는 “세월호 참사 때랑 바뀌지 않았구나 느꼈다”며 “우리 아이들 위해 활동하며 남아 있는 아이는 똑같은 일 겪는 사람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세계일보

'이태원 참사' 발생 100일째인 5일 오후 사고 현장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골목에 추모 메세지가 가득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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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

희생자 유가족들은 여전히 참사 당일인 지난해 10월 29일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참사 현장을 목격한 많은 시민은 이태원을 다시 찾지 못한 채 사고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방문객이 줄어든 적막한 이태원 거리에서 당장의 생계 걱정에 한숨을 내쉬는 이도 적지 않았다. 참사 후에도 일상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지만 미안함과 자책감이 곳곳에서 감지됐다. 이태원동에서 오래 거주했던 직장인 김경은(29)씨는 “모두가 아직 이 참사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방식을 찾지 못해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이날 벌어진 일을 각자 적절한 방식으로 소화해야 하는데 그냥 묻어놓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최소임(33)씨는 “우리 사회의 이태원 압사 참사 추모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본다”며 “그 이유는 자연스러운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지도 않고 책임자 처벌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태원 거리에서 만난 익명의 한 시민은 “충분히 슬퍼하되, 누군가의 자녀고 동생이고 친구였던 이들이 사랑한 거리가 다시 사랑의 거리로 회복할 수 있게 사회적 추모의 의미를 되새길 때”라며 “이태원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참사가 덮는다고 자연스럽게 없던 일로 흐려질 수 없고,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기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를 겪은 20대 젊은이들은 이태원 참사로 국가의 안전 시스템을 더 불신하게 됐다.

20대 초반부터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를 겪고 있다는 김채운(29)씨는 “‘나의 안위를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며 “국가나 사회 지도층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는 확신이 안 든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번 참사 후 ‘이태원에 놀러 간 게 원인’이라며 희생자에게 화살이 돌아갔을 때 내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게 내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다”며 “참사 유족이 바라는 바가 이뤄지고, 사회적으로 참사 결과가 납득되면 이태원에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태원 참사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고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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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방문객 수 유례없는 감소…“이태원에 갈 수 없어요”

사회초년생인 오유림(25)씨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이태원을 방문했지만 참사 이후로는 이 공간을 찾은 적이 없다. 오씨는 “약속을 잡을 때는 즐겁게 놀려는 목적인데, 이태원역을 약속 장소로 제안하기가 어색해졌다”며 “그 사고가 일어난 장소를 방문하는 일 자체가 마음 아프고, 슬프다”고 말했다. 오씨는 “당시 뉴스에서 본 장면이 떠올라 내 자신이 감정적으로 예민해질 것 같아서 이태원 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은 없지만 이 장소를 피하게 된다”고 부연했다.

지하철 6호선을 타고 이태원에서 승·하차하는 인원을 봐도 이태원 방문객 수 감소폭은 유례없다. 5일 서울교통공사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가 유행하며 방문객이 큰 폭으로 추락했던 2020년 4월 말∼5월 초보다 현재 이태원 방문객 수는 더 적다. 2020년 5월 43만5912명까지 줄었던 이태원역 승·하차 인원은 코로나19 유행이 완화하며 2021년 5월 58만6606명, 1년이 지난 지난해 5월에는 80만9838명까지 증가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 5월(109만6244) 이용객 수보다 적어도 분명한 회복세였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후 지난해 11월 60만4873명으로 감소한 역 이용객은 12월에도 64만5650명에 머물렀다.

세계일보는 이번 참사로 안타깝게 숨진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들의 슬픔에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사회부 경찰팀=김선영·정지혜·박유빈·조희연·김나현·안경준·유경민·윤솔·윤준호·이규희·이민경·이예림·채명준·최우석·김계범·이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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